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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수니 Dec 03. 2015

#4 할아버지

두 번의 산티아고가 도와준 기적, 그건 용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할~(아)~~버~지~ 보~~고~~싶~~(어)~~


할아버지를 수 백 번 불렀다. 소리 지르며 울어댔다. 정말이지 바보가 따로 없었다. 까미노 여정을 마무리하고 스페인 묵시아(Muxia)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아가시고도 많이 울었지만 그렇게 한 맺히듯 운 적은 없었다. 울음이 제대로 터진 것 같았다.



묵시아는 이탈리아 친구 루이지가 말한 대로 정말 아름다웠다. 마을 입구부터가 포근하게 날 감싸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생각이 더 났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도 저렇게 잘 놀아주셨는데 항상 손잡고 돌아다닌 거 생각난다. 친손주라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던 우리 할머니.
묵시아에서 피에스테라로 떠나는 날 아침. 정말 파란색 하늘과 빨간색 해의 기운이 합쳐져 나한테 강렬한 메시지를 주었다. 힘을 내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합작품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걸음이 가벼웠다. 두 분의 응원에 힘이 났다. 물론 중반부로 갈수록 힘들었지만..^^
첫번째 산티아고. 그냥 이유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성당을 마주하고 앉아 "할아버지, 나 도착했어. 해냈어"라고 마음속에 되네이며 하렴없이 눈물을 쏟았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Camino de Santiago) 중 프랑스 길(Camino Francés)을 걸은 나는 또 걸었다. 까미노 후 까미노(동그라미 표시)다.



까미노 후 까미노. 산티아고-묵시아-피에스테라 구간.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면 걸음을 또 하기 쉽지 않다. 고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버스로 찍고 온다.


프랑스 남부 끝자락인 생장피에르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넘게 걸었지만 나를 찾지 못했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서 있지만 불안한 마음의 답을 얻지 못한 게 무거워 다들 말리는 데도 '묵시아-피에스테라-산티아고'의 90km 추가 코스를 밟았다. 외국인 친구까지 말렸던 이유는 내 몸 상태가 무리하면 안 될 정도로 나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와서 병원 가 보니 족저근막염이 심하게 걸려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걷고 나면 불편한 내 마음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없었다. 조금 멀리서 수도공사 인부들이 날 쳐다보는듯했지만 누가 말려도 말릴 수 없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 따로 없었다. 할아버지한테 할 말이 많은데 할아버지가 없어서 쌓아왔던 응어리들이 3년이 지나서야 풀리는 것 같았다.



2012년 7월부터 32일 간의 흔적. 이렇게 많은 발자국 흔적에도 복잡한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는 건 아직도 미스테리다.




하늘에서 날 보시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가를 되돌아보게 되는데 그럴 때는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기일 때마다 드리는 말, “할아버지 미안해.” 할아버지가 지상에 없는 순간부터 난 이상하게 반쪽짜리 신경원이 되어 버렸다.


나의 사고는 전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가족과의 관계는 물론 고모들과의 관계도 내 미래에 대한 고민도 어떻게 해야 그가 하늘에서 마음 편하게 지내 실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찌 보면 바람직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다.


가끔은 잠시도 흐트러지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난 또 용서받기 위해 할아버지께 왔다. 할아버지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그가 운명한 순간부터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매개체는 있을까. 할아버지가 우리 자매 곁에서 수호천사 역할을 해주신다는 걸 항상 느끼고 있지만 오랜만에 찾은 할아버지 묘 앞에서 그와의 만남은 평소보다 애틋하게 느껴진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까미노 여정에서 마무리 단계에서만 할아버지가 생각났던 건 아니다.


까미노 걸음 나흘 째,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on)를 올라가는 길에 만난 풍차를 보며 할아버지와 가까이 닿는 기분을 느꼈다. 한 발 한 발 헐떡이는 고통에도 '할아버지한테 다가가면 할아버지한테 미안한 마음을 풀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막연하게나마 희망찬 생각을 했다. 이곳은 괜히 용서의 고개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선수 치며 말해줘도 난 죄책감에 휩싸여 살았다. 그 죄책감의 무게가 상당해서 내려놓을 생각조차 못했다.


팜플로냐(Pamplona)에서 페르돈 고개를 오른 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향하던 날.



첫 번째로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스멀스멀 끓어오르긴 했다. 새벽부터 걸음을 시작해서 동트는 모습을 볼 때면 말없이 눈물을 쏟곤 했는데 그때 같이 겉던 두 언니들은 그런 내가 조용히 울 수 있게 도왔다. 그 눈물로 걸음이 흔들리고 늘 꼴찌로 목적지에 도착해도 얼굴 하나 찡그린 적이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 눈물을 존중해주었던 걸 생각하면 어른스러웠던 언니들이 지금도 참 고맙다.




노리플라이 노래를 들으며 문득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린 이날.


그라나다 시가지는 지난 날을 부드럽고도 아름답게 이끌어준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생각하게 된 알람브라 궁전.

노리플라이의 바람은 어둡고.


다시 스페인 땅을 밟기 2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스페인의 바람을 잔잔히 느낄 때도 있었다. 유럽 땅에 처음 와서 보니 단둘이 살면서도 할아버지랑 같이 많은 일을 하지 못해서 죄송스러웠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올라 그라나다 시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생각났다. 바람들이 내 머리와 얼굴을 쓸어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부드럽게 도왔다.



구파발 기자촌에 있던 돼지고기 가게. 부산 구시가지 동네처럼 1970년대 풍경이다. 골목 젤 안 쪽 '비닐천막'으로만 둘러진 추억의 그 가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 북한산을 오르시는데도 혼자 보낸 거도 죄스러웠다. 집에서 그렇게 가까웠던 북한산도 같이 가는 걸 귀찮아했던 나다. 그래서 기자촌이  재개발되기 전 언젠가 할아버지와 불광동에서 구파발로 연결되는 코스를 걷고 기자촌 구석진 곳의 허름한 고깃집에 간 추억이 소중해졌다. 할아버지랑 북한산 하산 길에 들렀던 그 따듯한 고기 가게가. 은평구에 뉴타운이 들어선 지금. 이 가게는 당연히 없을 거다.





할아버지와 그의 절친 임 회장님께서 '인생의 마지막 열차'(당시엔 전혀 상상도 못했던)쯤 적절한 술과 달콤한 대화로 우정을 완성하신 가게이기도 하다. 임 회장님은 이 가게를 위해 직접 시를 쓰셨고, 그걸 가게 주인은 액자로 걸어 두었다.


할아버진 '우리 손녀' 생각에 돼지고기, 때로는 순대나 갈비탕도 들고 오셨다. 그 가게를 갈 때면 한 번도 빠짐없이 나를 위해 하나라도 사 오셨다. 가게가 허름해도 고기 품질은 항상 최상이었고, 포장 또한 소위들 말하는 '에지' 있게 돼 있었다. 어느 날, 말로만 듣던 이곳을 찾았을 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게는 낮은 두 건물 사이에 비닐 천막으로만 둘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이유는 단 하나. 겉으로 보기엔 화려했던 할아버지와 임 회장님의 삶은 역시나 이렇게 소박 해서였다. 포장만 보고 갈비탕 한 그릇을 1만 원 정도에 파는 '그럴듯한 가게'려니 했었으니깐. 비닐 벽에 걸린 임 회장님의 시는 현판이나  다름없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이 가게의 추운 기운을 느끼며 소주 한 병을 후딱 비웠는데, 난 그 소주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두 번째 산티아고. 까미노 후 까미노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진에도 티가 날 정도다.



두 번째 산티아고. 묵시아와 피에스테라를 거쳐 다시 산티아고를 도착했을 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할아버지를 맘껏 애타게 불렀을 때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나의 죄책감을 덜어준 느낌이 든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말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밤새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잠든 나를 한참 쓰다듬어주셨을 때처럼. 당시 할아버지는 저승사자를 한창 보기 시작하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실 때였는데 잠깐 정신 드셨을 때 머리를 사랑스럽게 소중하게 기특하게 어루만져주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만 생각하느라 까먹었던 우리 할머니도 떠올랐다. 숙명여대 합격통지서를 함께 확인하고 나서 조용히 안아주셨던 그 느낌을 난 생생히 기억한다.




그렇다.
여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할아버지다.


세상에 없으면 삶이 막막해질 엄마도, 한때 스쳐갔던 남자도, 사회생활 시절 무자비하게 괴롭혔던 상사도 드문드문 생각나곤 하지만 유독 절대적인 인물은 할아버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발걸음마다 할아버지가 눈에 아른거린다.


아쉽다.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을 되돌려도 아쉬운 부분이 많고, 보내지 못한 시간을 떠올리면 더 가슴 아프게 아쉽다. 가슴이 아파도 아주 많이 아파서 길거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는다. 할아버지와 했던 대화를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내 가 얼마나 못돼 먹고 부족하며 경솔한 인간인지 모른다. 왜! 왜! 돌아가신 뒤에야 되돌아보게 되는 건가.


농담 삼아 신랑한테도 말한다. 내가 당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할아버지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 할아버지만큼 '온전한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우리 할아버지는 내 말을 가장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다. 할아버지를 하늘에 뺏기고 나니 그 점이 가장 마음 아프도록 그립다. 언제나 내 편에서 나의 뜻을 세울 수 있게 응원해준 마음 한  조각조각들이 죄다 그립다. 난 항상 내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았다. 지금도 찾고 있다.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몰라. 잘 계셨어? 하늘에서 또 귀 얇아서 전철에서 파는 건전지처럼 허접한 물건이나 사고 있는 건 아니지? 할머니랑 티격태격하지 않고 지내고 계시고? 하늘에서도 아침부터 테니스 하고 계실 게 뻔하네. 그래도 건강 생각하셔서 제발 적당히 하셔. 손주 사위는 잘 감시하고 있지? 의심이 안 갈 정도로 좋은 사람이지만 혹 문제 있으면 귀띔해주고. 할아버지야, 늘 그랬듯 내 옆에서 잘 격려해주고 아프지 않도록 잘 돌봐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수천 번 말해도 모자랄 만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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