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추혜인

by 김우진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왕진 가방이 수사적 표현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정말 왕진을 다니는 의사 이야기였다.

왕진 의사라면 옛날 드라마에서 부잣집 주인공이 급하게 전화기를 돌리 나타던 나이 지긋한 남자 의사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진짜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나가는 의사라고?


지금도 왕진을 다니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 적잖이 놀란 나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하다 눈시울을 붉혔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가슴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나 환자의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의사가 있다니!


내가 그동안 만난 의사들은 우연인지 몰라도 (혹은 운이 없어서) 성별을 막론하고 권위는 기본 탑재요, 반말은 옵션이었다. 내가 환자로 가든 아이의 보호자로 가든

대부분의 의사들은 무표정하고 기계적이며 말이 적었다.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하고

행여나 질문이라도 하면 한숨을 쉬거나 귀찮다는 듯 억지로 답변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늘 쫓기듯 진료실을 떠나곤 했던 나에게 따르릉 선생님의 존재는 가히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되었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여성의 질병은 '예민해서'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많은 20~30대 여성들은 심한 통증을 호소할 때에도 의사가 예사롭게 보아 상처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통증에 민감하고 불안이 높다고 의사들이 으레 믿고 있기 때문이다.(p.142)

출산 후 손목이 계속 아파 정형외과에 갔을 때였다 엑스레이조차 찍지 않고 "출산한 지 얼마나 됐어요? 아이가 걸어요? 걸으면 다 나아~"라고 말하고 진료를 마치던 의사가 있었다. 난 '이 의사가 경험이 풍부해 과잉진료를 하지 않는구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자구지책으로 수개월을 파스만 붙이고 버틴 내가 미련했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 역할로 인해 얻은 질병은 대수롭지 않거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 몫하는지 모른다.


또 한 소아과 의사는 집 근처 병원에서 둘째 아이 예방 접종을 못해 찾아가자 "1차는 다른 곳에서 맞으셨네? 약 없으니 필요할 때만 여기로 오면 우리도 좀 그렇지"라고 말했다. 면박이랄까 타박이랄까. 그런 소리를 듣고도

화를 내긴커녕 얼버무리며 웃어 넘기 건 아기에게 주사를 놓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환자를 병원 수익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그 의사와 달리 따르릉 선생님은 환자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신뢰를 구축하려는 의사였다. 지역주민들의 삶에 스며들기 위해 김장도 하러 다니고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아주는 진짜 주치의가 되고자 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어린 환자와의 약속 때문에 부모가 놓아달라는 예방접종을 맞추지 않는가 하면, 소화불량 환자에게 '안심(安心)'을 처방하고 심한 저체중 어르신께 침대를 처방하는 의사.


이렇게 환자의 말과 마음에 귀 기울여주고 나아가 환자의 생활환경까지 염려해주는 의사가 있다니 당장이라도 그 병원 근처로 이사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따르릉 선생님은 제목처럼 왕진 가방 속에 페미니즘을 넣고 다닌다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페미니즘 진료란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것. 환자가 자신의 삶에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건강의 주권이 환자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고양이를 너무 기르고 싶은데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환자에게 무조건 키우지 말란 말보다 같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빈혈 수치가 높은 비건에게 당장 고기를 먹으라는 말 대신 철분제나 다른 영양소를 권유한다고 하셨다.

환자의 삶의 맥락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진료를 해야 한다고 하시며.



이런 가치관으로 환자를 진료하신 이야기들은 때로 눈물을 흘리게 하다 어느새 웃음을 짓게 하는 감동 그 자체였다.

게다가 감동에서 그치지 않고 사소하지만 정말 궁금했던 의학지식까지 알게 된 건 보너스랄까.

매일 달고 사는 두통의 원인, 자꾸 체하는 이유, 가족 간의 비염 유전, 아기가 모기 물리면 크게 붓는 이유 등등 나조차 의사에게 물어볼 생각도 못했던 사소한 것들을 다정한 말로 전해 듣는 동안 효과 좋다는 진통제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하게 내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정작 만나 뵌 적 없는 의사 선생님이 내 고민에 대해

답변해주시는 기분은 좋으면서도 정작 내 주변에서 이런 분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코로나 19로 인한 혼란 속에서

애써주신 수많은 의료진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고

어디선가 좋은 의사분들도 많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내 주변엔 그런 의사가 없다고 느껴 서운하다면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의사를 지금 바로 만나고 싶다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그 옛날 어느 의류 브랜드 광고처럼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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