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진 Dec 30. 2021

"왜 여자를 이기려고 해."

우리는 모두 동등할 뿐입니다.




첫째 딸아이가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남자아이와 계단에서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기면 한 칸씩 올라가는 아주 심플한 놀이, 안 해 본 사람이 별로 없을 특별할 것도 없는 놀이이다.


남자아이가 가위바위보를 연신 이겨 열 계단 정도 차이가 났고 딸아이는 계속 지는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재미있는지 웃으며 놀고 있었다.


정작 안달이 난 건, 남자아이의 엄마였다. 본인 아들 말고 내 딸아이를 걱정하느라 말이다. 남자아이가 두 칸이라도 올라가려 하면 한 칸씩이라고 만류하시고, 계속 이겨서 신이 나 딸아이를 놀리면 그러지 말라고 혼내시기도 하고. 우리 딸이 속상할까 봐 계속 살펴주시는 모양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참 다정하시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몇 번만에 겨우 가위바위보를 이겼을 때, 그 엄마는 우리 딸아이에게 귀속말로 두 칸을 올라가라고 했다.


'아니 왜 아이에게 반칙을 가르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눈치챈 남자아이는 한 칸씩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아이가 그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결국 남자아이가 이겼고 밑에 있던 그 아이 엄마는 계단을 올라오시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왜 여자를 이기려고 해."


내 귀를 의심하며 행여나 딸아이가 들었을까 살피니 다행히 딸아이는 동생에게 무언가를 말하느라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분은 그 말을 두어 번 반복하시며 이미 뛰어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뒤쫓아가셨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저분은 훗날 자신의 아들이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 있어서도 여자에게 져주기를 바라실까?'하고 생각해본다.


여자를 이기려고 하냐는 말속에는 남자가 여자를 봐줘야 한다는, 즉슨 남자가 당연히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딸이 놀이터에서 놀다가 심심치 않게 듣는 말 중에 "철수가 영희 지켜줘."라는 것도 있다. 아들 가진 엄마들이 자주 하시는 말이다.


그분들의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나, 여자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학습하고 자라나는 아들들이 건강한 성평등 의식을 가진 성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별인지 모르고 하는 말과 행동은 더 쉽게 흡수되는 법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그저 재미있게 규칙을 지키며 하면 그만이다. 거기에 왜 성별의 의미를, 그것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고정관념을 투영하는가.


여자는 봐줘야 할 존재가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지켜야 할 의무도 없다. 그저 그들은 이 사회의 동등한 시민이고 똑같이 존엄한 존재들일뿐이다.


선의로 하시는 말씀에는 더 대꾸할 수도 없어 웃어넘기지만 그렇게 씁쓸한 기운이 오늘도 마음에 또 한 겹 쌓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왈가닥 여자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