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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Nov 21. 2022

"너도 초콜릿 많이 먹으면 저렇게 돼."

사과받지 못하고 남은 상처


비대면으로 어머님을 만나오던 시간들이 3년 가까이 흘렀다. 그러다 지난 주말, 둘째를 낳기 전인 2020년 1월에 어머님과 외출을 한 이후 처음으로 병원에서 면회가 아닌 외출을 허용해주었다.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둘째는 벌써 세 살이 되었는데, 영상통화와 유리창으로만 보던 할머니와 드디어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원 로비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한동안 온기를 느꼈고, 손녀들을 쓰다듬으시는 어머님의 손길이 바빴다. 말씀을 잘 못하시는데도 "좋아라"를 연발하시던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오래 귓가에 남는다. 


33개월 딸은 기어코 자신이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겠다며 언니는 손도 대지 못하게 울고불었고 결국 아빠가 미는 휠체어에 손을 얹고 종종걸음으로 할머니를 따라갔다. 그런 손녀를 마냥 귀여워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에서는 오랜만에 행복함이 묻어났다.





가까운 식당으로 이동하여 같이 식사도 하고 한적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회포를 풀다가 어머님께 필요한 물품을 사러 대형마트에 가게 되었다. 휠체어 때문에 주차하기 전에 차를 잠시 세우고 어머님을 먼저 내려드리고 휠체어를 타시게 하려 했는데, 뒤에서 기다리던 남성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불만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정확한 단어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 짧은 2~3분의 시간조차도 (집에나 있어야 할 장애인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묻어났다. 불쾌했지만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모른 척 넘기며 마트로 들어서야 했다.


나는 두 아이를 돌보느라 함께 다니지 못하고 남편이 어머님의 휠체어를 밀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초콜릿을 먹다 말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어머님을 가리키며 자신의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엄마, 이 할머니 왜 그래?"
"할머니가 다리가 아프시대. 너도 초콜릿 많이 먹으면 저렇게 돼."


이 짧은 대화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 듣고 있던 남편은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를 내기도 뭐했던 남편은 "초콜릿 먹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라는 말만 겨우 남기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고 분에 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애꿎은 남편을 나무랐다. 왜 화내지 않았느냐고, 왜 사과받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사실 사건의 당사자인 남편의 자책감이 제일 심했을 거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후에 남편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곁에 계신 어머님께 너무 죄송했다고 했다. 죄송할 사람은 그 막말을 내뱉은 아주머니인데, 상처받은 채, 반성까지 해야 되는 먹먹함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었다.


아무리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세상이라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사자를 보며,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순간 어머님이 느꼈을 모멸감과 남편이 느꼈을 당혹감이나 무력감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년 만에 들뜬 마음으로 외출을 했다가 봉변을 당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서 남편과 나는 내내 분노했다.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이 더욱 후회가 되었다.





예전에  배달노동자들 인터뷰 기사에서 배달기사 분 면전에서 한 엄마가 자녀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고생하는 거야."라고 말했다던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믿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여기거나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막말을 하는 것이 과연 그 개인만의 잘못일까? 그렇게 해도 문제없는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 어떤 잘못을 물어야 할까?


장혜영 의원이 세바시 강연에서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를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거리에서 장애인을 자주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동권 문제나  차별적 시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역시 어머님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코로나 이전에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한 적도 있었지만, 택시 잡기도 기다리는 것도 늘 너무 힘들어 어느 순간부터는 휠체어를 실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차를 빌려서 이동하곤 한다. 그 조차도 타고 내리며 오래 정차할 때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계산을 하려고 기다릴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는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견뎠을지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런 차별적 시선들이 결국 장애인의 외출을 막고 그리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애인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비장애인들은 이동권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한다.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가려져 있고, 갇혀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은 경사로가 없이 계단만 있어서, 어머님은 휠체어를 밖에 두고 힘겹게 걸어 들어가셔야만 했다. 그저 손녀들 보시는 것이 좋아 하루 종일 웃고 계시기는 했지만, 어머님 마음속에도 나와 남편의 마음속에도 여러 상처들이 남았다.


누군가 자신의 신체에 대해 혐오 표현하는 것을 듣는다면, 자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조차 자신의 몸을 부정하게 버리는 서글픈 일은 누구의 잘못인가.


많은 사람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아주머니를 향해 어떤 말을 했어야 속이 시원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신이 내뱉은 그 말은 혐오표현의 다름 아니라고, 당사자를 향한 인격모독이라고, 아이의 교육을 망치는 길이라고, 그리고, 당장 사과하시라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상처가 남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다. 또한,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 법이다.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은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홍은전,  「그냥, 사람」 p.125


세상이 조금씩은 변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걸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미약한 내가 인생을 그려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에는 인간이 너무나 미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그 끝에 다시 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곳에서 포기하지 않고 인권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와 당사자 분들을 떠올리면 다시금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래서 결국 더 노력하자고,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조금 더 부딪혀보자고, 목소리를 내보자고, 그것조차도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말자고 다시 한번 말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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