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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Dec 13. 2021

게으른 김밥의 최후

나도 엄마가 싸준 김밥이 먹고 싶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주째 집콕을 선택했다. 심심해서 몸부림을 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같이 김밥 싸는 놀이를 떠올렸다.


머릿속으로는 어린이 요리 교실처럼 활기차고 즐거운 활동을 상상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게으름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근을 길게 썰어 넣으려니 새로 씻고 깎는게 귀찮아 자투리 당근을 채 썰었고, 심지어 시금치는 며칠 전 엄마가 택배로 보내주신 나물반찬으로 대체해버렸다.



그렇게 생략해도 아이가 직접 싸 볼 수 있도록 꼬마김밥 크기로 재료를 따로 준비하고 도톰한 달걀지단까지 준비하는데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쳤다 벌써.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러 김밥을 싸자고 했다. 서투른 솜씨로 동생을 주겠다며 꼬마김밥을 싸는 아이를 보는 순간은 그나마 보람이 있었다.

 첫째가 싸고떠난 꼬마김밥. 다행이 둘째가 맛있게 먹었다


아이는 꼬마김밥을 겨우 4개 만들더니 그만하겠다고 가버렸고 나머지는 내 몫이 되었다. 아이를 위한 김밥 싸기 활동이었건만... 


그래도 김밥을 쌀 때면 20줄은 기본으로 싸시던 엄마를 생각하며 9줄만 싸면 된다고 스스로다독였다.


거의 김밥을 싸 보지 않았던 나는 옆구리 터지는 김밥과 김 끝이 제대로 붙지 않아 너덜거리는 김밥을 싸고 있었다.


그래도 김밥의 꽃은 썰었을 때 색색깔 예쁜 그 단면이 아닌가! 그것을 기대하며 썰어보았지만, 대충 썰어 넣었던 당근과 시금치나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김밥 속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결국 주황빛도 초록빛도 선명하지 않은 단면을 보고야 말았다. 게다가 김밥을 말 때 제대로 꾹꾹 눌러주지 못했는지 재료들 사이가 헐거워 금방이라도 재료가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썰어놓은 김밥을 하나 주워 먹은 딸아이가 결정타를 날렸다.


"할머니가 싼 김밥이 더 맛있다."



서운하지 않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게으름이 내 마음을 지배할 때부터, 그 게으름이 귀찮음과 후회를 동반한 마음으로 변해갈 때부터 이 김밥이 맛이 없을 거란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다.





김밥을 싸며 엄마를 생각했다. 어렸을 때 소풍날 아침이면 부엌에서 김밥을 싸시던 엄마, 그 옆에서 달랑달랑 하나씩 집어먹는 김밥이 그렇게 꿀맛이었다.


성인이 된 후 엄마의 김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김밥천국이 대유행이었고 싸는 것보다 사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다.


그러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엄마가 싸준 김밥이 먹고 싶었다. 그때 연신 배부르다고 하면서도 혼자 네 줄은 족히 먹었었다. 그렇게 엄마는 다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에게 김밥을 처음 싸준 것도 내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세 살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김밥 재료를 차례로 집어 주면 엄마는 고작 그런 걸로 당신의 손녀가 천재임을 확신하며 시종 함박웃음을 지은 채 김밥을 싸셨다.


엄마의 김밥 재료는 언제나 풍성하고 윤기가 났으며, 색색깔 예쁜 김밥 단면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계속 들어가는 신묘한 기운까지 갖고 있었다. 이제야 그 신묘함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다.



엄마의 마음에는 게으름이 없었다.



당신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쏙쏙 집어먹는 자식과 손자를 보고 싶어 재료를 준비할 때부터 정성을 쏟았고, 그 기쁜 마음은 모든 과정에 깃들어 김밥을 윤이 나고 맛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딸아이에게 할머니 김밥보다 맛없는 엄마 김밥을 만회해보고자 할머니가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달걀말이 김밥을 시도했다. 지단이 조금 찢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딸아이가 그 김밥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엄마의 김밥은 20줄을 싸도 금방 동이 났는데 9줄밖에 싸지 않은 내 김밥은 절반이 남아 차갑게 식어갔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점심에 먹고 남은 그 차가운 김밥을 다시 내놓기 위해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직도 게으른 내 마음을 나도 어쩌지 못해.


김밥을 계란물에 담갔다가 부쳐냈다. 노릇노릇 구워야 하는데 사실, 조금 태워먹었다. 딸아이의 눈치를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비장의 무기, 컵라면을 꺼내 든다. 김밥 친구는 라면이라며. 라면을 먹기 위해 애써 김밥을 먹는 안쓰러운 딸아이를 보며 또 생각한다.


게으른 엄마라서 미안해.
할머니를 따라가려면 아직 먼 게 아니라,
아마도 영원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





올 겨울이 가기 전에 엄마에게 전화해 어리광을 한 번 부려야겠다.


엄마, 엄마가 싸준 김밥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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