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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Jan 26. 2024

[문장]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최은영)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제목처럼 빛이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최은영의 소설집.

'빛', '흰', '환한', '시린', '차가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먹먹한 기분을 자주 느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마음 속에 담아 둔 말을 서로에게 다 하지 못한 채 헤어지기도 재회하기도 하는데 그것으로 끝일뿐 이미 달라진 자신들의 변화된 일상을 지키기 때문이다. 지나간 기억들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기억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남은 삶을 살아내게 하는 빛이 된다.


자매, 엄마, 딸, 동경의 대상들이 각기 품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무시와 참견, 불신과 비난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순간들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다 널 위해서'라는 말로 '내 생각이 맞고',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숨긴 채(어쩌면 자신도 속은 채)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그런 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예전엔 안 보이던 것을 보이게 하고,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만들고, 지향하는 삶의 방향마저도 바꾸게 할 만큼의 힘이 있다. 비록 그것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 남을지라도.




남기고 싶은 문장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31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 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응주의, 능동적인 순종. 그런 말들에서 나의 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글쓰기는 물론이고 말하기에서도 옳다고 믿는 일을 비난받고 싶지 않거나, 긴 논쟁을 하기 싫어서 두루뭉술하게 의견 없는 의견을 말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황정은의 『일기』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리면 목소리를 내는 일에 조금 더 용기가 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일기』p.133~134


p.33

  그녀는 복제 인간인 캐시가 죽음을 앞두고 계속해서 헤일셤에서의 일을 기억하려 하는 것이 아름다웠다고 답했다. 캐시는 헤일셤을 기억하는 행동으로 자신의 친구 루스와 토미의 영혼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기 자신의 영혼조차도. 헤일셤은 그러니까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캐시 자신일 수도. 루스일 수도. 토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나를 기억하는 사람과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일치한다는 것은 꽤나 큰 행운이자 행복이다.
질비아는 나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년 전의 나와 이십 년 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계속 변해왔다. 원치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한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계속 잊어버린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정확히 그런 망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홀로』p.26~27



「몫」

p.73

  여성 문제요? 본인이 돌아가신 분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건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너무 다른 입장 아닌가. 희영은 그런 삶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삶에 대해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희영이 그렇게 가난해본 적 있어요? 몸을 팔아야 할 만큼? 대학 교육까지 받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신발 신으면서 희영이 같은 여자랍시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p.79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p.75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쓰지도 않고 읽기만 하는 내가 방구석에서 분노하며 나는 어떤 이들과는 다르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걸 늘 부끄럽게 생각한다.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부채감을 덜어내기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서 소액으로 이곳저곳 기부만하는 것 또한 부끄러움의 하나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에게든 나쁜 영향을 덜 주고 의미 있는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일 년」

p.115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서운함에 대해 적확하게 들어맞는 표현.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에 담긴 폭력성이라니.


p.120

저는……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중략)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p.123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 여러 가면을 골라 쓰고 살아야 하는 삶에서 온전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주는 위안은 그 존재가 사라져 곁에 없다 해도 영원히 마음의 창문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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