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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Feb 26. 2021

요리 비책을 쓰는 남자

엄마의 손 맛도 연습에서 나온다.


출산 3주 차, 산후도우미 분도 친정엄마도 안 계시고 오롯이 남편이 가사를 도맡게 되었다.


그때까지 남편은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몰랐다. 물론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든 돌아간다. 하지만 빨랫감에 따라 세탁 방법과 시간, 사용 세제가 다르기에 유독 집안일엔 기억력이 한 남편을 위해 종이에 써서 세탁기 앞에 붙여두니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나마 청소는 청소기의 힘을 많이 빌리니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요리에 있었다. 그동안 볶음밥 정도를 해본 적은 있지만 반찬과 국을 만들어본 적 없는 남편은 유튜브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유튜브엔 없는 게 없다더니 요리 방송은 넘쳐났고 남편은 자신에게 맞는 방송을 골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시작도 전에 운동용품에 집착하는 것처럼 한동안 남편은 유튜브 방송에 나오는 요리 부재료와 도구를 구비하고 싶은 마음에 장을 보러 가면 그동안 안 쓰던 재료들을 자꾸 사모으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자주 사용되지 않아서 넣지 않거나 다른 걸로 대체하던 것들(월계수 잎, 캐러멜 색소, 들기름, 감자전분, 튀김가루, 통후추, 매실청, 바질)은 물론 고춧가루도 고운 것과 굵은 것이 따로 필요하다거나 소금도 굵은소금과 꽃소금을 따로 써야 한다며 사고 싶어 했다.


요리 도구들도 튀김기부터 뚝배기, 각종 그릇 등 이것저것 사고 싶다고 하는 걸 말리기 바빴는데 나중엔 급기야 중식도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난 그렇게까지 안 해도 잘 먹을 수 있는데 남편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요리에 재미가 들려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 위에 놓인 까만 수첩에 남편 글씨로 '요리 비책'이라고 써진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열어보니 요리마다 레시피나 주의사항 같은 것이 적혀있었다. 세상에나, 라면도 잘 못 끓이던 남자가 요리 비책이라니. 동반휴직 덕분에 모든 요리 재료는 빚으로 사고 있었지만 휴직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TV프로에 요리프로가 늘어나고 특히 남자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들이 자주 방영되면서 요리가 성별을 불문하고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서울시에서 발간한 '2020년 서울시 성인지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맞벌이 경우에도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경험상 가사노동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식사 준비와 뒷정리이다. 식단을 정하고 장보는 일부터 따지면 식사 준비는 제법 힘든 노동에 속한다.

남편도 직접 장을 보기 시작하면서 많이 달라졌는데 유통기한 확인은 기본이고 뒷면의 성분을 보며 첨가물도 확인한다. 어느 마트 어떤 품목을 자주 할인하는지, 어느 마트 채소가 더 싱싱한지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부추 한 묶음이 너무 많아 식단을 생각하며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했다며 멋게 웃기도 했다. 양파를 다듬다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청양고추를 썬 손으로 눈을 비벼 저녁 내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직접 해보니 장보기부터 식탁에 음식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신적 신체적 노동이 필요한지를 알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음식들을 빠르고 맛있게 해 주셔서 엄마가 원래 요리를 잘하시는 줄 알았다"라고, "사실 엄마도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수 없이 하다 보니 잘하시게 된 거였을 텐데"라고. 결국 엄마의 손맛이라는 건 부단한 수행의 결과였음을 스스로 겪어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과 달리 요리가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콩나물도 다듬고 고구마 줄기도 벗기고 멸치 똥도 땄으니까. 무엇보다 마가 안 계실 때 '오빠' 밥을 차려줘야 했으니까. 

형만 있던 남편과 오빠가 있던 나는 이미 열 살 무렵부터 요리에 대한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라영 책에 이를 정확히 표현한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딸은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아들은 밥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할 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사람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역할 분담이 되어 있을 뿐이다.(p.56)
이라영 저 / 동녘 / 2019년


남편이 한 음식초보가 한 것치고 꽤 맛있었다. 어쩌면 남편의 노력이 너무 대견하여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만든 음식들

 어느 날은 밥을 먹는데 남편이 자신이 한 반찬들의 조리과정을 설명하며 저번과 무엇을 다르게 했는지, 더 맛을 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계속 이야기해주는데 딱 신혼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 조리 과정을 모르는 남편에게 맛이 없거나 있는 이유에 대해 자주 설명하곤 했는데 때로는 변명이었고 때로는 칭찬받고 싶어서였다. 그런 말이 생색내는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면 숨겨진 노력을 영영 모를 것이 서운하기도 한 복잡 미묘한 마음이었다.


그때 남편은 그런 과정은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맛있다거나 먹을 만하다는 짧은 말을 했다.

난 맛이 있는지 없는지 보다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데 남편이 조리과정을 잘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겠구나' 싶어서 괜스레 마음 한편이 울컥해오는 것이었다.

그런 약간의 감동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복수(?)해주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바로 '먹을 만하다' 표현이었다. 예전에 남편의 그 말은 곧 '맛없다'라는 말과 같아서 속상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딴에는 나를 배려한다고 한 말이지만 표정이나 밥 먹는 모양새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남편이 한 요리들을 맛있다고 해오던 어느 날,

일부러 '먹을 만 해'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대번에 '맛없구나?' 하며 시무룩해했다. 복수 성공!

그리고 그제야 예전의 일에 대해 말해주며 당신이 나의 감정들을 알아가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이제 남편은 내 젓가락 질만 보고도 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맞힐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아빠도 엄마도 부엌에 드나들며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자랄 두 딸아이도 같이 알아으면 하는 것이 있다.(설령 아들이었다 해도. 아니, 그럼 더욱더 강조해야 했을지도.)


'밥을 짓고 밥을 주는 일'에 대한 노동가치를 명백히 인식시키기, 나아가 여성의 밥하기 노동이 '자연스러운 성 역할'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같은 책 p.166)



덧붙여,
남편이 하는 요리 중  내 최애 메뉴는 김치찌개와 도토리묵무침이다.

정말 흔한 메뉴이지만, 이제 나에겐 너무나 특별하고 감사한 인생 음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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