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썰렁한 개그와 철 지난 유행어가 섞인 부부의 대화는 첫째 딸아이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꾹꾹 참으며 받아준 후 나누는 비밀 대화이다.
신혼 때 치킨을 먹을 때면 난 치맥, 남편은 항상 치콜(치킨+콜라)이었다.체질적으로 맥주 반잔에 얼굴이 벌겋게 되기도 하거니와 맥주가 왜맛있는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던 남편이 육아휴직 후 알코올홀릭이 되었다. 육퇴 후 맥주 한 잔을 마셔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라며 매일 거르지 않는 지경이 된 것이다.
두 아이를 다 재우고 나면 대략 10시경이다. 우리는 보통 마른안주에 500ml 캔맥주 하나를 나눠 마시는데 어떤 날(딸아이와 꽤나 고전을 치른 날)은 내가 330ml를 먹어야하기에250ml가 적정량인 남편은 미니캔을 딴다.
그래서 김치냉장고 한 칸에는 용량이 각기 다른 맥주들이 늘 차곡히 채워져 있다. 어쩌다 미리 채워놓지 못하면"비어 칸이 비어서 마음도 텅 비었어"이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서로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른다.
우리의 비어타임은 하루의 소회를 나누는 것을 기본으로 독서와 영화감상이 번갈아 곁들여졌는데 그래서 붙인 이름이BBC와 BMW이다. 각기 Beer•Book•Chat / Beer•Movie•Whisper를 뜻한다.
BBC타임에는 서로 마주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다가 의미 있는 내용을 공유하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구한다.그러다 보면서로의 책 내용을 얘기하고 답하느라 정작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수다만 떨다 자는 날도 부지기수이다.남편은 둘째와 나는 첫째와 다른 방에서 자는데 늦었으니 자자고 각 방에 들어간 후에도 메시지로 수다를 떨다가 "이럴 거면 왜 방에 들어왔지?" 하며 자제하고 잠자리에 드는 날도 많았다.
BMW타임에는 관심 있는 영화를 보며 대사를 듣는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수다를 떤다. 영화관에서처럼 몰입해서 보는 것도 좋지만 장면마다 서로 소통하며 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관람법이다. 더 실컷 웃고 더 마음 편히 울 수도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본격 수다타임을 가지면 서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물론 같은 장면에 대해 서로 다르게 느낀 점도 알게 된다. 영화를 본 즐거움에 더해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뒤따르는 것이다.
한 번은 선물 받은 와인이 있어서 WBC타임을 가지려 했으나(심지어 없던 와인잔도 사고 안주도 감바스로 준비했는데) 잔과 안주를 차려놓고서 와인 오프너를 못 찾아 결국 와인잔에 맥주를 따라 마신 아쉬운 날도 있었다. 와인잔에 마셔도 맥주는 맛있었지만!
남편은 밑반찬보다 안주를 만들 때 성심을 다하는 듯하다.
둘 다 일을 할 땐 서로 밀린 업무를 하느라, 나만 휴직 중 일 때는 나는 육아에 지쳐 아이를 재우다 자고 남편은 역시나 업무를 마저 보느라 함께하는 저녁 시간이 많지 않았다.덩달아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동반 육아휴직을 하니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체력 소모도 절반만 하게 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오롯이 부부의 대화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는 동반 육아휴직의 가장 좋았던 점으로 이 대화 시간을 꼽는다.
이시간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같이 거닐었고 부모에 대한 상처를 보듬었으며 같이 늙어갈 내일에 대해 용기를 갖게 되었다.부부싸움의 횟수나 강도도 확연히 줄었는데 그것 역시 지난날에는 대화가 부족해서 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편이 다시 복직을 하여 비어타임은 주 2회로 줄었지만 늘어난 수다 욕구는 줄일 수가 없나 보다. 남편이자꾸 내가 딸아이와 대화하는 중에 틈만 나면 대화를 시도한다. 나는 짐짓 딸아이를 위하는 척 나중에 이야기하라고 하지만 사실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