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4부 모성과 육아(1)
이러한 심야 아까처럼 만사를 잊고 곤한 춘몽에 잠겼을 때 돌연히 옆으로 잠잠한 밤을 깨뜨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난다. 이때에 나의 영혼은 꽃밭에서 동무들과 끊임없이 웃어 가며 '평화'의 노래를 부르다가 참혹히 쫓겨났다. 나는 벌써 만 1개년간을 두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에 이러한 곤경을 당하여 오므로 이렇게 "으아." 하는 첫소리가 들리자 "아이고, 또." 하는 말이 부지불각중에 나오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어서 속히 면하려고 신식 차려 정하는 규칙도 집어치우고 젖을 대 주었다. 유아는 몇 모금 꿀떡꿀떡 넘기다가 젖꼭지를 스르르 놓고 쌕쌕하며 깊이 잠이 들었다. 나는 비로소 시원해져 돌아누우나 나의 잠은 벌써 서천서역국(西天西域國, 인도)으로 속거천리(速去千里)하였다.〔속히 멀리 갔다.〕
p.235
실로 나는 재릿재릿하고 부르르 떨리며 달고 열나는 소위 사랑의 꿈은 꾸고 있을지언정 그 생활에 사장(私藏)된〔사사로이 간직한.〕 반찬 걱정, 옷 걱정, 쌀 걱정, 나무 걱정, 더럽고 게으르고 속이기 좋아하는 하인과의 싸움으로부터 접객에 대한 범절, 친척에 대한 의리, 일언일동이 모두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할 소위 가정이라는 것이 있는 줄 뉘가 알았겠으며, 더구나 빨아 댈 새 없이 적셔 내놓은 기저귀며, 주야 불문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깨깨 우는 소위 자식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해지고, 내 정신이 혼미하여져서 "내 평생 소원은 잠이나 실컷 자 보았으면." 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하였으랴!
p. 236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p.213)
그달 29일 오전 2시 25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갖은 병 앓아보던 아픔에 비할 수 없는 고통을 근 10여 시간 겪어 거진 기진하였을 때 이 세상이 무슨 그다지 볼 만한 곳인지 구태여 기어이 나와서 "으앙으앙" 울고 있었다. 그때 나는 몇 번이나 울었는지, 산파가 어떻게 하며, 간호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도무지 모르고 시원한 것보다 아팠던 것보다 무슨 까닭 없이 대성통곡하였다. 다만 서러울 뿐이고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 후는 병원 침상에서 스케치북에 이렇게 쓴 것이 있다.
p.250~251
아프데 아파
참 아파요 진정
과연 아픕데
푹푹 쑤신다 할까
씨리씨리다 할까
딱딱 걸린다 할까
쿡쿡 찌른다 할까
따끔따끔 꼬집는다 할까
찌르르 저리다 할까
깜짝깜짝 따갑다 할까
이렇게나 아프다나 할까
아니다 이도 아니라.
박박 뼈를 긁는 듯
쫙쫙 살을 찢는 듯
빠짝빠짝 힘줄을 옥죄는 듯
쪽쪽 핏줄을 뽑아내는 듯
살금살금 살점을 저미는 듯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듯
도끼로 머리를 바수는 듯
이렇게 아프다나 할까
아니다 이도 또한 아니라.
조그맣고 샛노란 하늘은 흔들리고
높은 하늘 낮아지며
낮은 땅 높아진다
벽도 없이 문도 없이
통하여 광야 되고
그 안에 있는 물건
쌩쌩 돌아가는
어쩌면 있는 듯
어쩌면 없는 듯
어느덧 맴돌다가
갖은 빛 찬란하게
그리도 곱던 색에
매몰히 씌워 주는
검은 장막 가리우니
이내 작은 몸
공중에 떠 있는 듯
구석에 끼여 있는 듯
침상 아래 눌려 있는 듯
오그라졌다 퍼졌다
땀 흘렀다 으스스 추었다
그리도 괴롭던가!
그다지도 아프던가!
차라리
펄펄 뛰게 아프거나
쾅쾅 부딪게 아프거나
끔벅끔벅 기절하듯 아프거나
했으면
무어라 그다지
10분간에 한 번
5분간에 한 번
금세 목숨이 끊일 듯이나
그렇게 이상히 아프다가
흐리던 날 햇빛 나듯
반짝 정신 상쾌하며
언제나 아팠는 듯
무어라 그렇게
갖은 양념 가하는지
맛있게도 아파야라.
어머님 나 죽겠소,
여보 그대 나 살려 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이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고.
- 1921년 5월 8일 「산욕(産褥)」중에서
p.251~254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