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는 자연성이 아니라 단련성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4부 모성과 육아(2)

by 김우진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뮤리얼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


나혜석이 엄마로서의 삶을 솔직하게 말하고, 이혼 고백장을 쓴 후 나혜석은 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그녀의 그림과 글은 평가절하 되었다. 용기있는 그녀의 진실한 고백은 오히려 그녀의 말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말한 삶의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며 더 많은 여자들이 자기 삶의 진실을 이어 말하고 있다.





나는 어쩐지 몹시 선뜻했다. 냉수를 등에다 쭉 끼치는 듯하였다. 나를 낳고 기른 부모도, 또 골육을 같이 한 형제도, 죽자사자하던 친구도 아직 내 젖을 못 보았고 물론 누구의 눈에든지 띌까 보아 퍽도 비밀히 감추어 두었다. 그 싸고 싸둔 가슴을 대담히 헤치며 아직 입김을 대어 못 보던 내 두 젖을 공중 앞에 전개시키라는 명령자는 이제야 겨우 세상 구경을 한 핏덩어리였다.
이게 왠일인가?살은 분명히 내 몸에 붙은 살인데 절대의 소유자는 저 쪼끄만 핏덩이로구나! 그리하여 저 소유자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으레 제 물건 찾듯이 불문곡직하고 찾는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 일이 이다지 허황된가……." 하고. 그리고 "에라 가져가거라." 하는 퉁명스러운 생각으로 지금까지 맡아 두었던 두 젖을 쪼그만 소유자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하회를 기다리고 앉았었다. 그 쪼끄만 주인은 아주 예사롭게 젖꼭지를 덥석 물더니 쉴 새 없이 마음껏 힘껏 빨고 있다. 내 큰 몸뚱이는 그 쪼그마한 입을 향하여 쏠리고 마치 허다한 임의의 점과 점을 연결하면 초점에 달하듯 내 전신 각 부분의 혈맥을 그 쪼그마한 입술의 초점으로 모아드는 듯싶었다. 이와 같이 벌써 모(母) 된 선고를 받았다.
p.255


출산 전 모유 수유에 대해 배우고 상상할 때는 아름답고 포근하고 평화로운 장면들이 떠올랐다. 엄마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순간인 것처럼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처음 아이에게 젖을 물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낯설고 어색했던 기억과 생각보다 빠는 힘이 세서 놀랐던 기억, 아이가 자꾸 잠이 드는 바람에 상상했던 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다 아기가 젖을 제법 잘 빨게 되었을 때 오물오물 젖을 빠는 아기를 보면서 잘먹는다 기뻐하는 마음이 들자 비로소 엄마가 된 듯 느껴졌었다. 뱃속에서 열 달 동안 그것을 익혀 나왔나 싶어 인간의 생존 본능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젖을 문채 잠이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젖을 빨 때 실제 많은 힘이 들어 잠이 든다고 하니 '젖 먹던 힘까지'라는 말은 사실 꽤나 큰 힘이다.


아무튼 모유 수유를 하게 되면서 젖을 주거나 유축을 할 때 남편이 곁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아이에게 젖을 주기 위함인데도 특히 유축을 할 때는 뭔가... 깔때기를 젖에 대고 있는 모양새가 꼭 소가 된듯한 기분이 들어 민망하고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몸은 내 것이 아닌 아기의 소유가 된 듯했는데 비단 수유가 아니어도 하루의 일과, 나의 행동은 아기를 위한 일들이 대부분이 었으니 실로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겨우 먹여 놓고 재워 놓고 누우면 약 2시간 동안은 도무지 잠이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어찌어찌해서 잠이 들 듯하게 되면 또다시 바시시 일어나서 못살게 군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기(機)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엔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내 눈은 항상 체 쓴 눈이었고 몸은 마치 도깨비 같아서 해골만 남았다. 그렇게 내가 전에 희망하고 소원이던 모든 것보다 오직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 종일만, 아니 그는 바라지 못하더라도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 …… 진실로 잠은 보물이요 귀물이다. 그러한 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정의를 발명하여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했다.
p.256~257


나혜석이 자식을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한 것을 두고 과한 비유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악마'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하루에 시간 못 자다 보니 아이에게 원망의 마음이 솟은 적도 남편에게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피로가 쌓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도 쉴 수 없을 때,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종국에는 상대에 대한 애정마저도 걷어내 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때 내 소원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연속으로 3시간만 자보았으면 하는 것이었으니 잠 못 자는 엄마들의 마음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때, 혼자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기적이고, 모성도 없는 비정한 모(母)라고 여겨질까 봐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혼자 삼켰던 감정들을 백 년 전의 그녀는 솔직하게 쏟아내었다.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그녀의 용기가 정말이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 있다 하면 2차부터 모 될 때에야 있을 수 있다.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 최초부터 구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5,6개월의 장시간을 두고 포육(哺育)할〔먹여 기를〕동안 영아의 심신에는 기묘한 변천이 생기어 그 천사의 평화한 웃음으로 모심(母心)을 자아낼 때, 이는 나의 혈육으로 된 것이요, 내 정신에서 생한 것이라 의식할 순간에, 비로소 짜릿짜릿한 모(母)된 처음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내 경험상으로 보아 대동소이한 통성으로) 모심에 이런 싹이 나서 점점 넓고 커 갈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솟는 정'이라는 것은 순결성 즉 자연성이 아니요, 단련성(鍛煉性)이라 할 수 있다.
p.260~261

1922년 4월 29일 1년 생일에 김나열의 모 씀.
《동명》(1923. 1. 1.~21.)



모(母) 된 감상기를 구구절절 동의하며 읽었지만 특히 모성애가 자연성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나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이자 때로는 나를 자괴감에 빠지게 했던 것. '모성애'. 나에겐 모성애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었는데, 모성애가 '단련성'이라는 문장을 읽으며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의 모성애는 6년째 단련 중에 있다. 때로 후퇴할 때도 있지만, 아이의 성장과 함께 고민하고 배우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비록 어제도 후퇴를 거듭한 못난 엄마였지만.)





나혜석은 모 된 감상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백결생(百結生)에게 답함이란 글에서 자신의 말은 제일 정직하고 용감한 말이었다고 맞선다. 그리고 소망한다.


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 중에 공명할 자가 있는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
p.271

「백결생(百結生)에게 답함」
《동명》(1923. 3. 18.)



나혜석의 글을 읽지 않았어도 그녀의 소망에 응답하는 엄마들이 많아진 시대이다. 단순히 동감하는 것을 넘어 '엄마'의 일이라 생각하는 일들을 '아빠'들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미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이 글을 권하고 싶다. 백 년 전 그녀에게 내가 위로받았듯 다른 누군가도 분명 위로 받을 수 있을 테니.






다른 책 리뷰보다 글 인용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꼭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남긴다. 밑줄 치고 혼자 몇 번이나 읽고 남편에게도 읽어주며 열심히 공부하는 부모가 되자고 다짐한 부분이다.


오직 미리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이 장성함을 따라 교육자인 부모의 교훈을 신뢰할 만치 부모 된 자는 반드시 그 시대 시대를 이해할 만큼 공부하기를 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280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조선일보>(1926. 1. 3.)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들은 '페미니즘', '노동', '돌봄', '장애', '동물권', '기후위기'. 공부하고 싶은 것들은 많아지는데 내 안에 게으름도 같이 커져가니 마음이 괴롭다. 이래서야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런지.

공부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 모 된 자의 의무이기도 하니, 아무래도 조금 더 부지런 떨어야겠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나혜석 저 / 장영은 편/ 민음사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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