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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Jul 01. 2021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네 살 터울 자매를 키운다는 것(4)





그날도 어김없이 딸아이는 무언가로 보채고 나는 자비 없이 딸에게 잘잘못을 따지며 딸아이가 좋아하는 TV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가 싫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주먹을 쥐고 내 어깨를 때렸다. 몇  번이나.


나는 당황해서 제지도 못하고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워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혼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떨떨하게 혼자 방바닥에 앉 있으면서 한 문장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아빠에게 훈육을 받은 아이는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순간 복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엉엉 울고 말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문장이 엉키고 설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지도 몰랐다.


'아이가 진짜 잘못한 걸까? 내가 아이의 사과를 받아도 될까?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나인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거 같은데?'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입 밖으로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진정하고 아이에게 화가 나도 때리는 행동은 안 된다고, 누구도 때려서는 안 된다고만 말했다. 내가 우는 모습에 같이 울먹거리던 아이는 알았다고 하며 내 품에 안겨 울었다.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또다시 생각한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그날 밤, 남편과 마주 앉아 아이가 저렇게까지 행동하는데 대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분명히 아이에게 분노가 쌓이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 분노의 원인을 동생 때문이라고만 보기엔 뭔가 부족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진짜 원인은 우리일 것이다. 아니 특히 나. 엄마라는 사람의 문제일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모든 일이 계획적으로 진행되길 원하는 성격이라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해야 할 일을 안 해놓으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성격이다. 한마디로 피곤한 성격, 스스로도 남도 피곤하게 하는 성격인 것이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8살 때부터 학교 다녀와서 숙제 먼저 하고 다음날 준비물 다 싸서 방문 앞에 책가방을 놓아야 놀이터에 나가는 아이였다."라고 하니 그 세월이 꽤 길어 고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런 내가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에게도 규칙을 부과하고 지키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둔 육아를 하고 있었다. 규칙 자체가 나쁘지 않고 좋은 습관을 형성해준다고 생각해서 남편도 동의한 육아 방식이었지만 아이는 거기에 길들여지면서도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염려를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아이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대견하기보다 안쓰러울 때도 있어서 그때마다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지면 그동안 해온 것들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서 포기하지 못했다.


아이가 날 때린 다음날도 아이는 밥을 먹으며 TV를 보지 못할까 봐 울먹였고 나는 그제야 나의 잘못이 눈앞에 확연히 펼쳐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자신에게 부과된 규칙들이 버거워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이는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 보여준 적이 없으니 4살까지는 TV 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5살 이후부터는 친구들이 스마트폰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심 자기도 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한 번도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여달라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TV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혼자 먹게 두면 식사 시간이 1시간에 육박하는 딸아이의 습관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언제부터인가 30분 안에 다 먹어야 TV를 보여준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딸아이는 20여분을 장난치다 남은 10분에 밥을 다 먹느라 늘 전전긍긍했다. 밥을 먹으며 계속 시계를 보고 "엄마, 나 TV 볼 수 있어?"라고 묻고, 못 볼 것 같다고 하면 울상을 지으면서 밥을 먹었다. 딸아이에게 식사 시간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만든 그깟 규칙 때문에.


그날 밤, 남편과 상의하여 아이의 밥 먹는 제한시간을 없애기로 했다. 물론 TV와 결부시키지도 않기로 했다. 아이의 방식을 인정하고 욕구를 존중해주면 아이 마음의 분노나 조바심, 집착 등의 부정적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까.


사실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솔직히 두려웠다. 다시 1시간씩 밥을 먹거나, 밥을 다 안 먹어도 TV를 볼 수 있다고 하면 대충 먹고 남길 것도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온유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또 화를 낼 것 같은 나 자신이었다.


남편과 한 가지 더 합의한 것이 있다. 바로 아이의 화장실 문제였다. 딸아이는 동생이 태어난 후로 손 씻을 때도 무섭다고 꼭 화장실을 같이 가달라고 했고 우리는 퇴행의 현상으로 받아들였었다.


몇 번은 들어주었지만 머지않아 부엌일을 하거나 동생을 돌볼 때 부탁하면 뭐가 무섭냐고 혼자 다녀오라고, 엄마 아빠 바쁜데 왜 그러냐고 면박을 주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아이는 가지 않고 투정하며 제자리를 오가다 결국 손에 묻은 오물을 벽지나 자기 옷에 발랐다. 그걸 보는 내 언성은 더욱 높아지고 아이는 울고. 그렇게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된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남편과 상의하여 절대 못 갈 상황이 아니면 일단 수용해주기로 하였다. 언제까지 그런 요구를 할지는 모르지만 "설마 내년에도 그러겠어?" 하는 마음으로 우선은 무섭다는 아이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름의 변화를 시도하며 아이의 행동과 감정을 살폈다. 덕분에(?) 참을 일이 더 많아진 남편과 나는 자제하기로 했던 평일의 비어타임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육퇴 후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들어가야 몸에 쌓인 사리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얼마간 인내의 기간들이 지나자 아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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