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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Sep 06. 2021

집안일을 엑셀로 정리하다가

정신적 부담을 아시나요?





엑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집안일을 항목별로 분담해 적기 시작했다. 남편은 간단하고 고정적인 일 위주로 나는 소소한 일부터 비정기적인 일, 가계 관리 등을 맡으면 될 것 같았다. 


가사의 기본인 빨래, 소, 설거지를 예로 들면 이렇다.


기본 빨래는 남편이, 이불 빨래나 인형 빨래 등은 내가 하는 식이다.(남편은 이불을 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 당연히 계절마다 이불과 옷을 교체하여 정리하는 일도 내 몫이다.


남편에게 청소란 '청소기'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나는 책장이나 장식장, 창틀의 먼지를 닦는 것, 침대나 가구 밑의 먼지를 빼는 것, 청소기가 닿지 않는 부분을 따로 청소하는 것까지 청소라고 여긴다. 따라서 청소기는 남편에게 일임하고 나는 그 외의 청소를 하기로 한다.


설거지는 남편이 가장 자주 하는 집안일인데 식기세척기에 들어갈 수 없는 그릇 몇 가지를 맡아한다. 설거지 역시 남편에게는 그릇과 수저를 씻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싱크대 볼, 설거지통, 건조대와 물받이, 수전까지 닦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은 기본 빨래도 청소기 돌리는 것도 내가 주로 해왔었기 때문에 그 두 개만 남편이 전담해줘도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역할 분담 내용을 적다 보니 남편의 가사도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분리수거나 화장실 청소도 남편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청소 주기가 2주를 훌쩍 넘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남편이 하는 일이 나에 비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를 말하기」에서 읽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동거생활에 혜안이 있는 사람들은 '손해 보는 듯 살아라'라고 충고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집안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한 몫이 더 커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조금 손해 보는 듯해야 비로소 각자의 기여도가 비슷해질 확률이 커진다. 이렇게 자기 객관화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스스로의 좌표와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다른 이들과 협력할 때 정확한 조율이 가능하다. 「말하기를 말하기」 p.101


나는 늘 내가 남편보다 집안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 속에 불만이 쌓여왔던 것인데, 막상 엑셀로 정리를 하다 보니 나와 남편의 업무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불만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자판 쓰기를 멈추고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가진 가장 큰 불만은 '할 일 생각하기'에 있었다. 


청소기는 남편이 돌려도 청소기를 돌리라고 말해야 하고, 화장실 청소는 남편이 해도 청소를 하라고 말해야 한다.


계절이 바뀌면 이불과 옷장을 정리하는 것

 에어컨이나 청정기 필터를 씻는 것

주방과 화장실의 소모품들을 구매하는 것

아이들 옷이나 신발이 작아 새로 사는 것

필요한 장난감이나 어린이집 준비물을 구비하는 것

아이들 예방접종과 영유아 검진 시기를 확인하는 것

양가 어른들의 생신, 기념일을 챙기는 것

하루하루 식단과 가족들 건강식품을 고민하는 것

자동차 정비와 세차, 보험 시기를 확인하는 것

가족들 건강보험, 가계 대출이나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것


이외에 나열할 수 없는 사소한 일들을 먼저 '생각'해서 남편에게 같이하자고 말하거나 부탁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모든 짐을 떠안은 듯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결국 지쳐버린 것이다.





살림에는 가사노동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정서노동이 있다. 정서노동은 집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일, 아이의 훈육과 교육도 포함된다. 집안의 정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이다. 이 정서노동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은 집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가족과 그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는 정서노동이다. 부모님들의 생일에 맞춰 전화하고, 어버이날에 보낼 작은 선물을 고민하고, 집안 행사를 위해 전화를 돌리고, 일정을 맞추고, 숙소를 예약하고, 결제하고……. 이 모든 것이 정서노동에 포함된다. …… 미세한 감정 교류가 필요한 일들이기 때문에 제법 품이 들어가는 노동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정서노동은 분담이 정말 어렵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 p.131


남편과 함께 읽었던 서한영교 작가의 「두 번째 페미니스트」 책의 일부이다. 분명 같이 읽었는데 나는 기억하고 그는 잊은 듯하다. 


엑셀로 역할분담을 수십 번 정리 한다한들 '정서노동의 문제가 해결 안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역할분담의 의지를 잃고 노트북을 덮었다.






며칠 후 우연히 SNS에서 '우리가 물어봐야 했었던 것들'이라는 만화를 보게 되었다. 너무 공감 가는 내용이라 공유해놓고 몇 번을 보았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정신적 부담'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었고, 그 만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둘 중의 하나의 노선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1. 정신적 부담을 지고 있으니 물리적 가사를 더 많이 남편에게 넘긴다.

2. 정신적 부담도 남편과 분담할 계획을 세운다.


1안은 내가 남편의 가사까지 슬그머니 하게 될 것 같고, 2안은 남편의 성향과 습성을 생각할 때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일 것도 같다.


결국 선택은 남편에게 맡기기로 하고 SNS로 만화를 공유해 보내주었다. 우선, '정신적 부담'의 존재를 알리고 인정받아야 하므로.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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