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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Sep 30. 2021

사랑과 우정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남편

가사의 민주화를 꿈꾸며





남편에게 '우리가 물어봐야 했었던 것들' 만화를 보내고 얼마 뒤 메시지가 왔다.

웹툰을 본 뒤 남편이 보내온 메시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남편은 '정신적 부담'에 대해 공감해주었다. 행여나 다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 섞인 마음으로 보냈었는데.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 「말하기를 말하기」, p.115


'허약한 평화'보다 서로 부딪히더라도 노력해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보낸 것이 다행히 긍정의 물꼬를 열어주었다. 게다가 남편이  분담의 의지도 밝혔으니 가사 역할분담을 다시 조정하기로 했다.





우선 욕실이나 세탁실 등에서 사용하는 고정된 생필품, 항상 두고 먹는 식료품이 떨어질 때쯤 사야 할 물품을 '생각'해서 주문하거나 사오는 일을 남편에게 맡겼다. 그동안 남편이 뭔가를 사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기도 하고 같은 물건도 최저가를 찾아 구매하지 못해 내가 맡아서 해왔다. 그러나 몇 백 원 비싸게 사더라도 남편이 직접 집안에 뭐가 필요한지, 가격은 얼마인지 알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기고 찾는 일도 이제 남편이 한다. 사실 열에 아홉은 남편의 옷이다. 그동안 깨끗하게 착착 걸어진 옷들을 당연한 듯 입던 남편은 옷들이 제 발로 옷장에 걸어 들어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가끔 세탁물을 못 찾아 출근할 때 입을 옷이 없어도 그건 더 이상 내 잘못이 아니다.


중요한 역할 하나가 더 있다, 급한 경우가 아니면 아이들 병원 데리고 다니는 일도 남편이 도맡기로 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는 일이 "아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어."라는 한 문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걸 남편도 알아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외출할 때 아이 물품 챙기는 것도 남편이 전보다 자주 하게 되었다. 첫째 아이가 돌도 안되었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생각보다 날이 쌀쌀해 무심코 "아이 발이 차다."라고 말했을 때 나를 나무라듯 "양말 안 챙겼어?"라고 묻던 남편이었다.


자신도 못한 생각을 아니,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내가 안 했다고 타박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다행히 이제 남편은 둘째 아이 기저귀가 모자랄까 봐 넉넉히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생필품 뭐 주문할 거 없을까?"
"내일 마트 들릴 건데 ~~~~말고 더 필요한 거 있어?"
"세탁소 다녀올게. 애들 한복도 맡기는 거지?"
"똑딱(병원 예약 앱) 대기 5명 남으면 출발할게."


남편이 먼저 집안에 필요한 것을 생각해 물어보고,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생각해서 진행해야 하는 일들이 꽤 많이 줄었다. 여전히 같이 상의하고 협력도 하지만 진행의 주체가 달라지자 내 마음의 부담이 많이 낮아졌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그냥 서로 함께하면 되지 뭘 그렇게 세세히 구분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전에 내가 거의 모든 일을 먼저 생각해서 남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시켰을 때는 남편도 나도 뭔가 불편한 상하관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매번 똑같은 일을 굳이 말해야 하고 '딱' 시키는 그 일만 하는 남편에게 "당신이 로보트야?시키는 일만 하게?"라고 막말을 했다가 싸운 적도 있었다. 미안...


이제 예전보다 남편이 훨씬 더 많은 영역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고 먼저 행동하므로 자연스레 지시 형태의 대화가 줄었다. 게다가 각자 맡은 부분을 명확히 하고 나니 책임감도 생기고 상대방의 협력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도 커지는 효과가 있었다.


함께 집안일을 하는 것은 똑같지만 시켜서 하는 상황과 스스로 하는 상황은 가정의 화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시키기만 하고 한 사람은 시키는 것만 하면, 주인과 하인의 관계지 "우리"가 아니다. 짬을 내어 말없이 서로가 서로를 도와준 걸 확인하면, 가사노동 동료로서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가사노동자로서의 서로에 대한 신뢰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애인이기보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동료로서 역할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 p.130~131





결혼 7년 차, 설렘보다 익숙함이 더 크고, 육아 전쟁터에서 전우애로 살고 있다는 농담을 던지며, 육퇴 후 맥주 한잔에 TV를 보며 깔깔대는 제일 친한 친구이자 이제는 가사노동의 진정한 동료로 거듭나고 있는 남편.


그러나 가끔 손잡고 걸어갈 때, 문득 본 옆모습이 멋있게 보일 때, 예고 없는 손편지를 받을 때, 아이 밥 먹이느라 정작 내 밥은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밥 위에 살포시 놓아진 깻잎 반찬을 볼 때, 아직도 나는 남편이 사랑스럽다.


그렇게 사랑과 우정 사이 그 어디쯤에 남편이 있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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