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쌀쌀해지고 곧 김장철이라는 이야기에 7년 전 남편이 처음 우리 집에 인사드리러 갔던 날이 떠올랐다. 김장을 하는 주말이었고 남편은 그야말로 열심히 김장을 도왔다.
집을 방문하기 전에 아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다. "이 사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아빠가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좋겠어요."라고. 그래서였는지 아빠는 격식을 차리는 대신 남편 이름의 끝 글자만 부르셨다.
"훈이야."
김장하는 내내 "훈이야."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나중에는 끝이름만 부르는 것이 처음 본, 그것도 사위될 사람을 너무 막 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어쨌든 아빠는 내 편에 서서 좋은 생각만 해주셨으니 감사했다.
반면에 엄마는 어떻게 불러야 될지 고민하시느라 호칭을 얼버무리는 때가 많았다. 게다가 엄마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데려왔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심란하신지 매의 눈으로 사위될 사람을 살피고 분석하며 장점보다 단점만 찾아 걱정에 걱정을 만들고 있었다,
김장이 끝나고 반주를 곁들어 저녁을 드신 엄마는 살짝 취기가 오르셨는지 갑자기 노래를 부르러 가자셨다. 평소 노래하기를 좋아하시긴 했지만, 딸이 사윗감을 데려왔는데 이 무슨 민망한 상황인가 싶어 나는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남편 입장에서는 거절하기도 어려워 결국 우리는 라이브 카페를 찾았다. 처음 여자 친구 집에 인사 와서 졸지에 노래를 부르러 가게 된 남편에게 미안하고 엄마에게는 화가 났다. 엄마와 달리 가무에는 소질이 없고 내성적이기도 한 나는 원래도 노래방 문화와 거리가 먼 사람이기에 더 그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러 간 일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평소 노래를 곧잘 하는 남편은 김범수의 '지나간다'라는 노래를 불렀고(아마도 최선을 다해) 괜히 조마조마하던 내가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았을 때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엄마가 왜 우셨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본인의 삶이 힘드셨던 건지, 딸이 시집가겠다고 하니 심란하셨는지. 어쨌든 엄마는 노래 잘하는 사윗감에게 엄지 척을 주셨고 결혼 준비는 술술술 진행됐다.
결혼 후 내가 드리는 안부 전화보다 사위가 드리는 전화에 반가워하시고 사위가 작은 농담만 해도 크게 웃으시는 엄마, 뜬금없이 사위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고 보여주시던 엄마, 한 번 방문할 때면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하시던 엄마.
그 뒤에는 스스럼없이 장모에게 안부 전화를 해 딸보다 더 수다를 떨고, 무뚝뚝한 딸은 하는 법 없는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때마다 선물과 손편지를 드리는 사위가 있었다.
어젯밤, 손녀들의 재롱을 보여드리려 영상통화를 걸었다가 끊으려는데 남편이 갑자기 "어머님, 제가 드릴 게 있었는데.." 하며 주머니를 계속 뒤적거렸다. 내가 저 사람이 뭐하나 생각하는 찰나에 남편은 양쪽 주머니에서 손가락 하트를 꺼내 화면 속 엄마에게내보였다.
어이없어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박장대소하시며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아빠를 따라 하는 손녀들 하트까지 듬뿍 받은 엄마는 정말 푸근해진 얼굴로 전화를 끊으셨다. 아...... 미워할 수 없는 저 인간.
이런저런 이유로 남편이 가끔 미워질 때 7년 전 밤, 처음 본 우리 가족 앞에서 열창을 하던 모습, 처가 식구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나도 오늘은 남편 몰래 시어머니 가을 스카프를 고르고 있다. 작은 마음들이 모여 모두가 따뜻해지는 가을날이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