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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Nov 08. 2021

섬집 아기를 부르다 울어버린 남편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간다나




한글날 연휴, 공원에서 놀던 둘째가 두 손을 비비며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아이 두 손 사이에 벌이 한 마리 들어있었다.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휴지로 탁 쳐냈는데 이미 아이 손은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둘째가 손에 앉은 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비니 벌도 아이를 쏜 모양이다. 휴지를 살펴보니 다행히 벌침이 따로 빠져있었다. 하지만 아이 손이 점점 더 부어오르고 아이도 아프다고 우니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몰라 일단 근처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연고를 바르고 약 처방을 받아왔는데 약 때문인지 부은 것도 가라앉고 별 증상이 없어 우리는 안심하고 육퇴 후 비어타임을 가졌다.


그러다 자던 아이가 우는 소리에 남편이 아이 방에 가보더니 다급하게 체온계를 찾았다. 몸이 너무 뜨겁다면서. 아이의 체온은 40.3이었다. 놀란 우리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 옷을 벗겨놓고 해열제를 먹여야 할지 바로 응급실에 가야 할지 고민했다. 첫째 아이가 고열이 났을 때 해열제를 먹자 바로 토하고 열경련을 일으켰던 기억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응급실에 바로 가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둘 다 맥주를 마신 탓에 운전을 할 수 없어 택시를 타야 할 상황인데다, 곤히 자고 있는 첫째를 같이 데려갈 수도 없어서 남편 혼자 아이를 들쳐 안고 택시를 호출하며 집을 나섰다.





남편의 연락만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드디어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고열이 난다고 응급실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뿐더러 19개월 아이에게 수액을 놓는 게 쉽지 않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기를 권했다는 것이다.


열난다고 민소매 옷에 반바지를 입고 나간 아이가 새벽 1시에 응급실 밖에서 떨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급하게 조금 더 먼 병원에 전화를 걸어 19개월 아이에게 수액을 놓아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하여 남편은 다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집에서 남편 전화만 애타게 기다리는 동안 수없이 많은 자책을 했다. 낮에 아이가 벌에 쏘였으니 조심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으면 안 됐었다고, 병원에 가기 전에 해열제를 먹일 것을 그랬다고, 처음부터 대학병원으로 갔어야한다고 후회를 거듭하고 있을 때 남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전화통화 내용과 다르게 수액 놓는 것을 저어한다며, 대학병원으로 바로 가지 그랬느냐고 무지한 보호자 취급을 당했다고 했다. 아이가 집을 나선 지 이미 한 시간도 훌쩍 지난 때였다. 이제와 다시 대학병원까지 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일단 시도라도 해보기로 했다.


한참 후 휴대전화 메시지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수액을 맞으며 힘없이 남편에게 안겨있는 둘째 아이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데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낯선 두려웠던 아이는 수액을 맞는 과정에서 실신할 듯 울었다고 했다. 간호사는 남편에게 아이가 안정되도록 평소 부르던 노래를 불러주라고 했고 남편은 섬집 아기를 부르기 시작했단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가면 아이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 장......" 남편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울어버렸다고 했다.





남편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아픈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새벽에 택시를 태워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 것도, 작은 손에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일도, 무서움이 섞인 울음을 토하는 아이를 안고 달래는 것도 남편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첫째 아이 때 그랬던 것처럼.


열경련이 나는 첫째 아이를 데리고 새벽에 대학병원을 찾던 3년 전, 남편은 응급실에서도 졸던 사람이었다. 기저귀만 입고 가슴엔 무슨 전기장치를 붙인 채 우는 아이를 달래는 내 뒤에서 남편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살면서 가장 자주 불화를 겪던 시기였는데 졸고 있는 남편을 보는 순간 '저 인간이랑 이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할 만큼 화가 났었다.


그러던 남편이 그때 23개월이던 첫째보다 더 어린 둘째를 데리고 응급실에 갔다가 울어버렸다고 하니 내 마음도 같이 울컥했다. 어떤 심정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뒤섞이고 남편이 그때의 내 마음을 이제라도 알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코로나 검사까지 받은 둘째는 그렇게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남편과 돌아왔다. 나는 며칠이나 못 본 것처럼 둘째 아이를 받아 품에 안았다. 곤히 자는 아이 옆에 앉은 우리는 아직은 너무 작은 이 아이를 둘째라고 소홀히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고열은 며칠 동안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벌에 쏘인다고 그럴 수가 있나 싶었는데, 고열의 원인은 벌과 상관없는 열감기였다. 우연히 그런 사건이 겹친 것일 뿐이었다. 


열이 난지 5일째 되는 날, 드디어 열이 내렸다. 그 사이 열도 안 내리고 밥을 거의 안 먹기도 해서 한 번의 수액을 더 맞아야 했고 매일 밤 남편과 두 시간마다 열체크를 하며 심할 때는 해열제 먹이기를 반복했다.


아이가 아프고 나면 훌쩍 큰다고 했던가. 아이가 아프고 나자 아이 아버지도 훌쩍 큰 것 같다. 아이가 다 나은 후에도 가끔씩 열체크를 하고 밥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 한다. 꼬박꼬박 가습기를 씻어 아이 방에 넣어주고 밤에 아이가 우는 소리도 더 잘 듣는다. 다시는 아이가 아픈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듯. 





남편이 이제 아이를 재울 때 섬집아기는 안 부르고 아빠와 크레파스를 불러주던데, 그날의 기억이 싫어서 그런 것이려나.


그렇게 여기 남자도 아버지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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