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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Nov 15. 2021

"네 엄마가 네 것은 하나도 안사고 자기 것만 샀다."

'엄마는 맥주 사면 안 되나요?'




첫째 하원 길에 시간이 좀 남아 육퇴 후 비어타임을 위한 맥주를 장전하러 근처 마트에 들렀다. 남편과 육퇴 후 맥주 500ml를 반씩 나눠마시며 수다를 떠는 시간이 우리의 힐링타임이라서 맥주를 미리미리 사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사 중 하나이다.



며칠 전에 장을 보았기 때문에 딱히 살 것은 없어 맥주 여러 캔과 둘째가 좋아하는 미니약과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계산을 하던 직원분은 50대의 남성분이었는데 맥주에 바코드를 찍으며 나와 아기를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무심히 유아차 바구니에 맥주캔을 차곡히 정리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큰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엄마가 네 것은 하나도 안사고
자기 것만 샀다."


순간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직원분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말투에는 비아냥과 훈계조의 느낌이 혼재되어 있었다.


순간 어이없음과 당황함이 몰려왔지만 '농담으로 이해해주겠다'는 굳은 의지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약과는 아이 건데요." 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수였다. 그냥 아무 대꾸도 안 했어야 하는데. 아저씨(이제 직원분이라는 호칭은 쓰고 싶지 않다)는 내가 농담을 받아줘서인지, 자기 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지 한 술 더 떠 말했다.


"너는 그거 좋아하지도 않는데 네 엄마가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걸 샀다. 너 그거 안 좋아하지?"

(20개월 아기랑 진짜 대화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엄마'를 비난하는 것일 뿐)


나는 실로 오랜만에 귀가 뜨거워질 만큼 화가 나고 수치스러움까지 느꼈다. 내가 왜 아저씨한테 이런 농담, 혹은 진담일 소리를 들어야 하지?


그러나 화가 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고작 이랬다.


 "얘 약과 좋아해요."


또 무슨 말을 들을까 무서워 서둘러 유아차를 밀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얘 약과 좋아해요'라니. 나의 답변이 너무 한심하여 더 화가 났다.





그 아저씨에게는 뭐가 문제였던 걸까? 내가 콩나물과 두부를 계산했다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맥주가 문제인가?


그럼 만약 남편이 아이와 와서 그렇게 맥주를 샀다면 남편에게도 "네 아빠가......"를 운운했을까? 그것도 아닐 것 같다.


그 아저씨에게 문제는 '엄마'인 내가 맥주를 사는 것에 있었다는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 애엄마가 와서 반찬거리는 안 사고 술만 사가는 모습을 '무책임한 엄마' '나쁜 엄마'라고 비난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술을 사든 먹든 그 자체가 엄마의 자격과 무슨 상관이 있나?)


뭐라고 대꾸했다면 시원했을까 여러 문장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농담하시는 건가요? 저는 불쾌한데요."

"남편이 사 오라고 시킨 건데 전화해서 말하실래요?"

"제가 맥주 사는 게 아저씨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엄마는 맥주 사면 안 되나요?"

"우리 애가 약과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유치한 대답까지 떠오르는 짜증 나는 시간들을 보내다가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 아저씨의 행태에 대해 일렀다.(여기서는 '일렀다'는 표현이 너무 적절하다) 


남편은 나 대신 육두문자를 퍼부어주었다. 물론 나와의 대화창에서. 그래도 내가 생각한 여러 문장보다 남편의 육두문자가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그 후에 마트에 갔을 때 그 아저씨가 계산대에 있는 것을 보고 맥주를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왜 그런 고민을 해야 하나 싶어 짜증 나면서도 결국 맥주는 빼고 장을 보았다.


의문의 1패 같은 기분이 들어 내내 우울했다. 앞으로는 멀리 있는 마트를 가던지 남편에게 다녀오라고 해야겠다.


그도 아니면, 저 대사들을 연습해서 더 많은 맥주를 사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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