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고향에 적응하기
다행히 내려오자마자 일이 생겼다. 마을신문을 만드는 곳에서 신애의 엄마 미애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신애가 그림도 그리고 편집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대학 때 배운 편집디자인을 써먹을 기회가 올 줄이야. 신애는 집에서 5분 거리인 모임 장소로 헥헥대며 올라갔다. 하필 언덕 위에 있다니.
“신애 오랜만이다. 집에 잠깐 내려왔니?”
여전히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신애를 반겼다. 신애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게 무슨 죄라도 진 것 마냥,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네, 잠깐 내려왔어요.’라고 우물쭈물 대답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특히 달라진 건 사람들이었는데, 신애와 함께 나고 자란 친구들은 다들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살아서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귀농 온 젊은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많아진 동네는 낯설기도 했고, 새롭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주신애……. 아니, 씽씽입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한 신애는 아직은 어색한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별명을 부르는 지역 트렌드에 맞춰 별명을 지은 것이다. 최근 본 드라마의 여주인공 별명 '싱싱'을 차용해 발음되는 대로 '씽씽'으로 정했다. 남주인공 같은 애인을 만나길 고대하며 지은, 별생각 없이 지은 별명이었다. 지어놓고 보니, 불릴 때마다 신나는 별명이었다.
마을신문팀은 신애를 포함해 총 4명이었는데, 영은, 호호, 수영이었다. 영은은 편집장 역할을, 호호와 수영은 기자 역할을, 신애는 디자인을 맡았다. A4용지 크기의 4면으로 된 작은 신문으로, 한 달에 두 번 마을 소식을 담은 신문을 냈다. 비록 내용이 많지 않은 신문이었지만, 신애와 멤버들은 그 작은 신문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모이며 머릴 모았다. 월 50만 원이라는 많지 않은 돈에, 마감 때면 오탈자를 찾아내느라 신경이 예민해지곤 했지만 신애는 그 일이 퍽 자신과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신문이 나오면 어느 정도 뿌듯함도 뒤따라왔기 때문이다.
신애는 신문을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일도 병행했다. 발달장애 청소년을 위한 교육농장에서 보조선생님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곳의 식구들은 다들 개성 넘치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는데, 점심 때면 한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의 요리를 함께 먹었다. 햇볕이 쨍쨍한 날, 나무 식탁에 모여 채식 요리들을 직접 해 먹었다. 신애는 고기가 없는 채식요리도 이렇게나 맛있을 수 있구나 그때 깨달았다. 그 기억이 여름날의 빨간 토마토만큼 선명하게 떠오른다.
발달장애 청소년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신애는 긴장이 되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까도 걱정이 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거였다.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놀리면 어쩌지. 재미없는 선생님이라고 실망하면?'
아이들한테 놀림받고 무시당할 것 같다는 불안에 괴로워하는 신애였다. 다행히 상상은 현실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렇게까지 선생님에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고, 모두 예상했던 것보다 수업을 잘 따라와 주었다. 특히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는 은빈이는 신애를 잘 따랐다. 은빈이와 신애는 서로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이야기를 하며 같은 동급생처럼 꺄르르 웃곤 했다. 은빈이는 신애에게 시시콜콜한 자기 얘기를 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자기소개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신애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마음을 조금씩 여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일이 끝난 뒤에 시골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신애는 집에서 '짱구는 못 말려'나 '원피스' 같은 애니메이션을 봤다.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집에서 뒹굴뒹굴거렸다. 그러다 전화가 왔다. 호호였다. 동네 형이 집에서 치킨파티를 하는데 가겠냐고. 신애는 애니메이션을 보던 노트북을 닫았다. 마침 지루하던 차였다.
시골집 마당 한 켠에 반짝이는 조명을 걸어두고, 그 가운데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평상에선 치킨과 맥주를 먹고 있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시골에서의 홈파티 인가. 신애는 감탄했다. 호호는 신애에게 한 명 한 명 소개를 시켜주었다. 신애는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중, 평상 끝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신애 또래의 청년 차례가 되었다.
"이쪽은 재영, 딸기 농장 하는 친구고. 씽씽이랑 동갑이에요."
재영-그의 별명은 베리였다-은 요즘 말로 하자면, 이 동네 ‘인싸’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큰 키를 가진 그는 눈이 또랑또랑한 친구였는데, 처음 보는 사람도 낯가리지 않고 대했다. 그에게는 친구도 모임도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보드게임 모임이었다. 어느 날, 재영은 신애를 보드게임 모임에 초대했다.
금요일 저녁, 신애는 떨리는 마음으로 동네 만화방 계단을 올랐다. 모임에 아는 사람은 수영과 재영뿐일 것이었다. 그마저도 재영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만화방에 들어서자, 신애 또래의 청년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기소개하는 시간도 없이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뱅, 카탄, 루미큐브, 스플렌더 등 신애는 처음 해보는 보드게임들이었지만, 초보자도 금방 배워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신애는 금방 보드게임에 빠져들었다. 시간은 12시를 넘어가고, 새벽 1시~2시가 되어서까지도 게임을 즐겼다. 그럴 날이면 신애는 거실에서 TV를 보다 잠든 아빠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격주 금요일이 되면, 신애는 보드게임 모임에 갔다. 그건 신애가 일 외에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활동이 되었다. 일 외에는 방 안에 처박혀 애니메이션만 보는 신애에게 금요일 저녁은 굉장히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무기력하게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신애가 금요일 저녁이 되면 집에서 입는 후줄근한 잠옷이 아닌 깨끗한 옷을 입고 밖으로 외출을 하는 것이, 신애의 부모인 미애와 진탁에게도 좋아 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항상 그녀에게 잘 놀다 오라고 말하곤 했다.
신애의 만화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