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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May 01. 2022

'작별인사'(2022)를 읽고

작가 김영하 작품에 대한 단상(스포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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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영하의 오랜 팬으로써 작별 인사를 읽고 떠오른 단상들을 적은 글로서 스포는 거의 없다. 

- 글의 가독성을 위해서 존칭은 생략합니다. 


나는 김영하의 오랜 팬이다. 

지금처럼 김영하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쭉 그의 작품을 읽었고, 진심으로 좋아해왔다. 

아주 가끔, 그의 작품이나 행보에 대해서 조금은 안타까웠던 적도 있었지만, 2004년부터 지금까지 쭉 나는 그의 팬이고, 그가 쓰는 소설과 에세이는 죄다 찾아 읽었으며, 심지어 그가 나온 강연 유튜브도 거의 다 찾아서 들었고,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는 정말 초기부터 수십번을 돌려서 들었다. 

김영하를 따라한다고 맥북을 사고, 나도 팟캐스트를 만들어서 방송을 했다. 물론 소설도 좀 썼다. 어디에다가 발표는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김영하 덕분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라든가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같은 소설들도 재조명되었다. 개인적으로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중에서 카프카의 '소송'을 다룬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두 편이야 말로 내가 들어본 어떤 문학 강의보다 좋았다. 지금이라도 안 들어보신 분들은 찾아서 들어보시길 희망한다. 

어느날 그가 텔레비젼에 나오더니 진짜로 전국민이 다 아는 셀럽이 되었다. 아.. 그래서 찐팬으로서 좀 아쉬운 감이 있다. 하긴 그런데 2004년에도 이미 김영하는 문단의 스타였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아는 사람 중에서 김영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지언정 김영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언컨대,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소설 깨나 쓴다는 사람 치고 김영하의 영향을 안 받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옷을 입고 나타난 김영하

2000년대 그는 '포스트모던'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평론가들이 그를 '포스트모던'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의 소설에는 기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던, 운동권 소설의 무거움이나 칙칙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을 다룬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의 단편 '오빠가 돌아왔다'는 제법 무거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너무나 가벼운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나는 김영하 소설의 그런 점이 좋았다. 잘 읽히고, 재밌고,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고... 소설이 그 정도면 됐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김영하의 소설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을 기다리는 것은 힘들었다. 이번 '작별인사'는 '살인자의 기억법'에 이어서 무려 9년만에 나오는 정통 장편이다. 물론 김영하가 게으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동안 수많은 방송에 출연하고, 에세이집을 발간하여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소설을 쓸 때 가장 빛난다. 

아, 김영하 작품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지 하고 살고 있을 때쯤 이번 작별인사가 출간되었다. 사실 이 책은 벌써 1년 전에 이미 '밀리의 서재'에서 연재소설로 나왔던 소설이다. 일반 독자들을 위한 정식 장편이 새롭게 출판된 것이다. 김영하의 '퀴즈쇼' 역시 조선일보에 거의 1년 가까이 연재되었다가 출판된 바 있다. 


제목: 김영하만 쓸 수 있는 제목 

김영하가 소설가로서 완벽해 보이지만, 출판사 관련 업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영하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한다. 그가 소설의 제목을 잘 못 짓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가 가져온 제목들은 형편이 없다 못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어떤 편집자가 '담화'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장편의 제목을 지은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그가 처음 지은 제목은(잘 기억 안 나지만), 길고 이상했다. 


사실 소설 제목으로서 '작별 인사'는 뭐랄까, 김영하만이 지을 수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김영하만큼 유명해지지 못한 작가라면, "작별 인사"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단어를 소설의 제목으로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이하거나,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키워드나 문장을 제목에 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하 소설의 제목들이 다 그렇다. 좀 평범하고, 어디다 붙여놔도 괜찮을 것 같은 제목이다. "빛의 제국", "너의 목소리가 들려", "검은 꽃", 단편인 "악어",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 중에서도 "작별인사"는 일반적 제목의 끝판왕이다. 이건 웬만한 소설이나 영화에 그냥 갖다 붙여놔도 어울릴 것 같은 제목이다. 특히 주인공들이 죽거나 이별하면서 끝나는 거의 모든 소설에 어울려서, 그래서이상하기도 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제목의 소설이 없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 것 같은 제목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제목이 왜 "작별인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소설에서 만들어낸 여러 세계관과 특이한 설정, 장치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 '작별'의 느낌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 작별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모든 이야기는 조금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작가의 말에 보면, 작가의 와이프가 최초의 독자이자 편집자라고 하는데, 초고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자신의 초고를 읽고 우는 와이프를 보는 소설가의 기분이 어떨까, 나라면 째질 것 같은데...). 나는 그녀가 어느 장면을 읽고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김영하 소설의 백미는 그런 부분 같다. 어떤 특정한 감정을 만들어내 버리고야 마는 것. '작별인사'에는 제법 가볍지 않은 철학적 질문도 적지 않게 등장하지만, 역시 그의 장끼는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끔 만드는 것인 것 같다. '빛의 제국'에서 와이프가 남편에게 독백을 몇장에 걸쳐서 쏟아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장르: 철학 소설? 

이 소설을 읽다가 정말 많은 영화들이 떠올랐다. '아이로봇', 'AI', '터미네이터'와 같이 그냥 대놓고 로봇을 다룬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당연하게도 아키텍트를 설계한 '매트릭스'가 떠오르고, 목이 뎅강 날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워킹데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완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 '아일랜드'가 안 떠올랐으면 이상하다. 


예전 철학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철학적 질문을 깔짝깔짝 던져놓아 극의 재미를 극대화한다고 말했다. '공각기동대'를 모티프로 만든 '매트릭스' 역시 액션과 철학적 질문을 적당히 섞어놓아 재미를 극대화한다.


이 책에도 제법 철학적인 질문들이 많이 나온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철학'이란 냉정하게 말해서 조미료 같은 것이다. 요리로 말하자면, 닭도리탕을 만들 때 닭이라는 주재료가 가장 중요하다면, 독자들을 고무시킬 수 있는 철학적 질문이란 '고추장'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장소스로도 맛있는 닭볶음탕을 만들 수 있다. 좋은 철학적 질문이 없어도 재밌는 영화나 소설을 만들 수 있는데, 정말 좋은 질문과 좋은 이야기가 만나면 시너지가 폭발한다. 


'작별인사'에서는 조금은 노골적으로 철학적 질문이 등장하는 편이다. 사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도 느꼈지만, 김영하의 소설은 확실히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별인사'에서의 고추장은 내 입맛에는 맞았던 것 같다. 


'기계의 시간'

김영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지극히 도시적'이라는 것이다. 예전 소설에 보면 우리나라의 특이한 음식, 식물,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가 제법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 자연에 대한 묘사를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연보다는 차라리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딱딱한 과학법칙을 쉽게 설명한 구절들이 있다. 그래서 김영하는 좀 공학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 있다. 


사실 그의 글을 쭉 보았다면, 그가 기계에 대해서 좀 진심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초기 작품을 보면, 사람을 기계라고 생각해서 분해해서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한다든지 하는 단편도 기억난다. 또, 그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의 삼원칙을 꽤 진지하게 소개한 적이 몇 번 있다. 


개인적으로 로봇에 대한 공감을 진하게 느꼈던 영화라면, '터미네이터' 시리즈다. 신형 모델에게 두드려 맞는 구형모델을 보면서, "아프겠다", "불쌍하다"는 감정이 든다. 그리고 심지어 그가 떠날 때, 사랑하는 사람과 영영 작별하는 느낌마저 든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기계들의 반란, 애완기계...

이와 같은 소재들 역시 이 소재들만으로는 솔직히 좀 진부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이다. 어떤 철학적 양념을 입혀서 이와 같은 소재를 재탄생시키느냐가 소설의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에 철학적 질문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던 이유는 어쩌면 진부해보일 수 있는 소재에 참신함을 입히려고 고민한 흔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정치적 상상

'작별인사'에는 한반도가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 김영하 작가가 '탈정치'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제법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그 관심은 소설 곳곳에 녹아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는 통일 후 비용이 많이 드는 지역에 대해 정부가 관리를 포기한 것으로 나온다. 이건 진행되어 가는 '지역소멸' 현상을 노골적으로 시뮬레이션해본 소설가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자나 정책입안자는 차마 제대로 된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상상을 해야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텐데... 흠... 


단상의 마무리: 다음 소설은 조금은 더 빨리 볼 수 있기를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을 때, 나는 박사과정이었다. 책을 사와서 반나절만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는 박사를 받고도 훌쩍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연구자가 되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중에 영화로도 나왔다. 개인적으로 영화도 소설 못지 않게, 아니 소설과 다른 느낌으로 괜찮았던 것 같다. 


아.. 영화 이야기가가 나온 김에, 혹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영화 아시나? 그 영화에서 김영하가 까메오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심심하신 분은 찾아보시길 바란다. 


좋을 때도 있고, 조금은 아쉬울 때도 있지만, 나 정도면 김영하의 찐팬이라고 자부한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내가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다"고 말하면 이유 없이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나? 


나: 저 김영하 소설 좋아해요?

누구: 귀걸이 하고 다니는 얘?

나: 귀걸이가 소설과 무슨 상관...? 

누구: 걔 소설 별로야. 

나: 뭐 읽어보셨는데요? 

누구: 암튼 별로야. 차라리 ***, *** 소설을 읽어... 


진짜 신기한 건,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김영하 소설을 읽고 그의 소설을 변호했다. 예를 들어, 김영하의 '검은 꽃'을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묘사의 디테일이나 스케일, 그리고 스토리의 묵직함으로 보자면 '검은 꽃'이 '아리랑'보다 낫다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검은 꽃'은 한 권이고, '아리랑'은 열두권이다. 스케일부터 다르고 비교대상이 아니다. 


말 나온 김에 각 잡고 설명하자면, '태백산맥', '아리랑' 같은 소설이 다시 나와도 이젠 읽어줄 독자들이 없다. 지금 독자들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하느라 바쁘다. 책은 점점 짧아지고, 가독성이 높아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작가로 살아남는다는 건 7-80년대 작가로 살아남았다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인세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건 이문열, 조정래 정도 되는 작가들이나 가능했던 얘기다. 


지금은 완전히 시대가 바뀌었고, 김영하는 21세기 한국소설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선언한 셈이다. 한권으로 승부해야 한다. 인류가 엄청난 바다생물 포획을 시작하면서 바다생물들이 자신의 몸집을 줄여서 생존했던 것처럼 소설 역시 짧아질 수 밖에 없었다. 짧고 재밌어야 한다.  


나는 김영하의 팬이지만, 하루키의 팬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고, 기욤 뮈소의 팬이기도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가 소설을 읽는 것보다 그 양반이 쓰는 게 더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제법 읽었지만, 아직 반도 못 읽었고, 새로운 책이 계속 나온다. 다작이지만, 버릴 소설도 거의 없다. 당연히 김영하의 소설도 버릴 건 없다. 


김영하의 소설도 조금은 더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 9년은 좀 심하지 않나... 


아무튼..


끝. 


스포를 하기 싫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 

특히 아내가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선,

어떤 장면에서 왜 울었는지 알 것만 같은데...

혹시 궁금하신 분은 개인적으로 연락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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