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랜 김영하의 팬으로서, 또 지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작별인사'라는 소설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오늘은 나에게 흥미로운 요소를 주었던
몇가지 지점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제목에도 밝혔지만, 이 글은 작별인사를 읽은 사람들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스포를 엄청나게 포함하고 있다.
이 소설은 공식적으로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9).
여기까지는 그럭 저럭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인데,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충격을 받는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도대체 이 책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야? 라는 호기심이 밀려온다. 두세번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자작나무'가 뭔지 궁금했다. 소설에 첫 문장에 들어가는 단어를 소설가가 대충 골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우리에게는 태울 때 기름기가 있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작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남한 보다는 북한, 저지대보다는 고지대에서 많이 나타난다. 나무껍질이 흰 색인데, 기름기가 있어서 촛농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로 설탕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자일리톨이라고 한다. 자작나무숲이라면, 고지대이거나, 혹은 추운 지방이 연상되며, 혹시 배경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 혹은 그 위쪽이지 않을까?
소설을 다 읽으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작중화자는 기계이며,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죽어가는 장소는 오호츠크해 연안의 한 자작나무 숲이다. 이미 마지막 인간이자 주인공 철이의 친구가 죽었으며, 철이마저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이 기계는 자서전, 아니 유서, 아니 소설을 쓰고 있다.
컴퓨터를 새로 만들 때 자동으로 생성되는 폴더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직박구리'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엄청 흔한 텃새라고 한다.
참새보다 조금 큰 잿빛의 직박구리는 삐익삐익 소리를 내면서 우는데, 울음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아, 이 소리가 직박구리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철이는 어느 날 직박구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갑자기 아버지가 등장하고, 또 천자문 이야기가 나온다.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도. 사실 이 소설의 공식적인 첫 챕터인 "직박구리를 묻어주던 날"에는 이 소설이 SF일 것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이 부분만 읽고 있으면, 굉장히 지루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하다. 또 생뚱맞은 천자문 이야기, 학교가 수용소라느니, 홈스쿨링도 스쿨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아빠(최박사)는 철이를 만든 설계자이며, 인간과 닮은 휴머노이드(애완로봇)을 만드는 연구원이다.
소설은 공식적으로는 총 19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는데, 그 중 두번째 장을 펼치면 소설의 '본색'이 드러난다. 철이는 인간이 아니라 무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잡혀간다. 두번째 장이 되면, "아, 이 소설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 혹은 갈등을 그리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략 맞다.
철이는 수용소로 가면서 아빠가 보여주었던 좁은 세계를 빠져나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민이와 선이를 만난다. 민이는 자기가 로봇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휴머노이드이고, 선이는 여자아이이다. 이 소설은 민이, 선이, 철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전개되지만, 사실상 선이와 철이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의 비중이 높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남은 인간과 기계의 사랑 이야기? 이렇게도 읽힐 수 있겠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 스킨십과 두근거림이 있는 그런 사랑은 아니다.
이쯤 되면 독자도 철이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헷갈리게 된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철이는 기계일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이 셋은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를 탈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민이는 총에 맞아서 죽고, 머리가 잘려 나가게 된다. 사실 민이는 휴머노이드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잔인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머리가 잘려나간 것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소설의 중반부터 철이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추론한다. 소설에 따르면, 최박사(아빠)는 거의 인간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하게 철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계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던 셈이다. 통상 우리는 기계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예술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건 웬걸? 철이는 직박구리를 묻어줄 정도로 동정심과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로봇은 "터미네이터"류의 "그런데 눈에서 왜 물이 나오니?"라고 말하는 그런 로봇이지만, 철이는 슬픔을 느끼고,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예술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정도로 인간과 차이가 없는 로봇이다.
선이는 끝까지 민이를 살리고 싶어한다. 심지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조차 민이를 살릴 수 있는지 물어본다. 철이가 민이와 똑같은 애를 복제할 수 있다고 하자, 선이는 자신이 기억하는 민이를 만나고 싶은 거지, 복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아우라'와 관련이 있다. 아날로그 예술의 세계에서 작품은 오직 하나로만 존재하며, 이것을 우리는 '아우라'라고 말하고, 이 단어는 영어의 진정성(authenticity)라는 단어의 어원을 같이 한다. 흔히 말하길,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진정성이란 없어졌다고 말하는데, 선이는 기계인 민이에게 아우라, 즉 인격과 개성을 부여하고, 민이를 그리워한다. '터미네이터'에서 T-800(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분명 인조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총에 맞아서 살갗이 벚겨지면 아픈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I'll be back"이라고 말할 때 슬픔이 느껴진다. 기계에게 인간이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경험은 아니다. 아무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민이를 선이가 그리워하는 것은 지극히 사람다운 반응이다.
'작별인사'에서 기계는 당연히도 꿈을 꾼다. 철이의 꿈은 '꿈에서 본 풍경'이라는 챕터로 비중 있게 묘사된다.
가장 자주 꾸는 꿈은 몸을 옴짝달싹 못한 채 어딘가에 갇혀 있는 거야...(중략)... 하늘에는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121-122)
이미 이 글은 스포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데, 이 꿈은 사실 예지몽이다. 그가 훗날 죽을 때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훗날 선이가 죽고, 그도 최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독수리가 원을 그리며 도는 장면은 두번이나 더 묘사된다.
먼저, 선이가 죽을 때, "개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울링을 하자 수천마리의 새가 날아와 원을 그리며 무덤 주위를" 날아다닌다.
그리고, 철이, 즉 내가 죽을 때 "까마귀와 독수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다".
이 "꿈에서 본 풍경"은 선이가 철이에게 자신이 인간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 언제였는지 물어보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역설적이게도, 철이는 자신과 선이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의 공통점이 또 드러난다. 그들의 공통점을 "꿈을 꾼다"라기 보다는 필멸(mortal)한 존재라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는 "나는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305)라고 썼는데, 사실 소설에서 보면 기계 역시 폐기처분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철이는 육신을 버리고 네트워크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죽음을 택한다.
처음 아빠는 매우 듬직하고 이성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최박사(아빠)라는 캐릭터는 불완전하다 못해 약간 싸이코처럼 변해간다.
무등록 휴머노이드를 생산하고 집에서 키웠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하는 장면에서 최박사는 국가에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철이를 국가가 수용소에 감금하는 것은 '학대'라고 주장한다. 사람을 잘못 대하는 것은 학대이지만, 기계를 가두는 것도 '학대'라 할 수 있을까? 경감은 아빠에게 "인정에 호소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기계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훗날 아빠는 철이의 위치를 신고하여 기동타격대가 철이, 선이, 민이를 공격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철이가 아빠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듣지 않고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최박사는 철이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했다. 이 과정에서 민이는 복원할 수 없게 되고, 선이도 공격을 받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떠나려는 아들, 그것을 붙잡으려는 아빠,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 인간사를 다루는 소설에는 꽤 자주 등장하는 는 내러티브이다. 하지만, 기계도 마찬가지다. 기계도 떠나려 하고, 최박사는 철이를 다시 데려와 인간다움을 전수시키고자 한다. 사실 이 때부터 최박사의 캐릭터는 너무 파국을 향해 빨리 치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시작점은 휴먼매터스가 있는 평양이다. 한반도는 통일되었으며, 경제활성화를 위해서 정부는 평양을 로봇 첨단지구를 만든다. 그리고 관리비용이 많이 드는 지방은 이제 그냥 소멸하도록 내버려둔다. 휴먼매터스는 사실 지방소멸, 그리고 기계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깥의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둥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최박사는 이 둥지 안에서 철이를 키우고 싶어했다.
결국 기계와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은 싱겁게 패배한다. 인간의 사실상 멸종하자, 지구의 기온이 예전처럼 돌아오고, 탄소배출량도 줄어든다. 기계와 인간의 전쟁, 그리고 패배는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등 SF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어찌보면 좀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정부가 지방을 포기하니 로봇이 지방을 장악한다는 이야기는 아프가니스탄을 떠오르게 만든다. 미국이 카불 등 수도를 장악하고 주변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자, 탈레반이 칸다하르, 헤라트 등 중서부 도시들을 공략하여 힘을 키운 다음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맞서싸운 것과도 비슷하다.
작가는 아마, 지금처럼 지방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무엇에 의해 지방이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게 꼭 기계 반군은 아닐지라도
사실 할 얘기를 더 끄집어낼 순 있지만, 이 정도 시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두 챕터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아빠를 제압하고 난 다음 철이는 네트워크로 존재할 수도 있었지만, 예전 자신의 모습을 한 육신을 찾아서 입고(put on), 선이를 찾아 떠난다. 선이는 오호츠크해 연안 추운 곳 어딘가에 살고 있다. 아마도 자작나무가 심어진 것으로 보아 숲속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선이는 이미 늙었는데, 철이는 다시 예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모자 같기도 했다.
선이와 철이는 몇 년을 더 산다. 선이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 철이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선이에게 "빨간머리 앤"을 읽어준다. 그리고 선이와의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 클론과 휴머노이드들이 철이를 안아주었는데, 철이는 기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철이는 '자작나무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곰에게 습격을 당한다.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철이는 쇄골절흔이라는 버튼을 통해서 다시 육신을 버리고 네트워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도 쇄골절흔을 누르면, 자신의 기억이 없어져서 선이와 민이, 그리고 아빠가 있는 기억이 없어진다는 것이 두려워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볼 수 있듯, 김영하는 '기억'에 대한 집착을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전체가 기계가 쓴 자서전, 혹은 기계가 쓴 유서, 나아가서 기계가 쓴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철이는 몇 문장을 남기면서 세상을 떠난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중략)... 석양이 기세를 읽고 이제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에서부터 점점 넓게 번져가며 거칠고 누른 땅을 덮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끈질기게 붙어있던 나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297)
프롤로그에 자작나무숲이 나온 이유, 그리고 뜬금없이 첫 챕터에서 천지현황이라는 천자문의 구절이 소개된 이유가 이 마지막 몇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사실 주인공이 곰에게 습격을 당하는 이 장면은 두 영화를 선명하게 떠오르게 만든다. 하나는 브레드 피트가 열연했던 '가을의 전설'이고, 다른 하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 "레버넌트"였다. 사실 전자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을의 전설'에서 주인공 트리스탄은 아내와 첫사랑, 동생을 모두 잃고 마지막 곰과 싸우다 다 인생을 마감한다. '가을의 전설'에서 트리스탄이 곰과 용맹스럽게 싸우는 것으로 끝나,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면,
'작별인사'는 곰과 싸워서 육신이 파괴된 이후에 부활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관찰하는 듯한 쓸쓸한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의 아내가 마지막 교정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아마 이 문장을 읽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