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 2022, 리처드 레티에리 저, 변익상.
오랜만에 서평으로 찾아왔습니다. 오늘 서평할 책은 ..
<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원제: Decoding madness: A Forensic Psychologist Explores the Criminal Mind,2021)> 리처드 레티에리 저, 변익상 옮김, 한국어판 출간 2022년.
입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0280076
가끔 넷플릭스 아이디를 공유하는 아내가 내 시청 목록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고 한다. <계단: 아내가 죽었다>, <나는 살인자다>, <아메리칸 머더: 이웃집 살인마> 등 범죄물이 많기 때문이다.
범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잘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범죄 뉴스를 접하고, 무서움과 안도감을 느낀다. 또한 범죄로부터 안전하려면 어떤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https://www.goodreads.com/book/show/54982961-decoding-madness
<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원제: Decoding madness: A Forensic Psychologist Explores the Criminal Mind)>는 정신분석학자 리처드 레티어리가 2021년에 내놓은 따끈따끈한 신작이며, 국내에서는 애플씨드 출판사에서 변익상 번역가의 도움으로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무척 따끈따끈하면서도 흥미로운 책인데, 번역가의 꼼꼼한 번역과 출판사의 기획으로 우리 옆으로 온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안 되는 영어로 꾸역꾸역 사전을 뒤져가며 읽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자접근성을 높여주고, 시간을 아껴주는 출판사와 번역가에게는 항상 빚진 마음이다. 물론 가장 빚진 건, 오랫동안 법의학 정신분석가로 일하면서 그 기록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은 리처드 레티에리 박사이다.
여기 나오는 살인사건은 읽어 내려가기 흥미로우며, 읽었을 때는 잔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범죄 내용 자체는 끔찍하다. 자기 자식을 살해한다거나, 긴 시간동안 함께했던 아내를 목 졸라서 살해한다든지, 여러 여성을 강간 살인한다든지, 이런 모든 범죄는 결과적으로 끔찍하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어느날 아침 갑자기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아니다. 많은 범죄자들이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일찍이 마약과 알코올문제에 노출되며, 부모의 폭력 학대, 경제적 가난에 시달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서, 혹은 그와 상관없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안에서 범죄자의 변호사와 검찰은 일종의 신경전이 이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변호사는 범죄자의 심신미약을 주장하며, 검사는 심신미약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많은 경우 심신미약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책에도 소개되어 있듯이, 가끔은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때 법의학 정신분석학자는 범죄자와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책의 뒷편에 소개된 설문지를 활용하여,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물어보기도 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이고 난 직후에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 심신미약의 정황이 있었더라도, 그 당시에는 정신이상이 아니라고 간주된다. 물론 이것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법의학 정신분석가(사실 이 번역어는 약간 의문인데, 원어가 Forensic Psychologist 면 “법의학 심리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그 모든 증거를 상세히 분석하여 배심원 앞에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정신분석학이 의학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우리가 잘 아는 오은영 박사님은 ‘의사’다), 사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에서 보듯이, 정신분석학은 넓은 의미에서는 철학, 좁은 의미에서는 심리학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사회과학적, 혹은 인문학적 척도와 상상력이 한 사람의 범죄사실의 경중을 다루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점이 조금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법의학 심리학자가 얼마나 이런 판정에 기여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는 심리학 박사로서 학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차분하게 살인사건의 범죄자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묘사한다. 심리상태란 단순한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그 사람의 과거 이력, 사회관계, 평소 약물복용 여부 등 그 사람의 범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요인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의 소견을 발표한다. 이 결과에 따라서 범죄자의 심신미약의 주장은 받아 들여질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전문가의 권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며,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부분이 너무도 많았는데, 예를 들여 판사가 흉악한 남자범죄자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하면서 여성범죄자에게는 약간 비하하는 듯한 판결 어휘의 차이를 보인다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또 여자 배우자의 외도에 분노해서 그녀를 살해한 남자 살인자에게는 과실치사가 적용된다는 통계도 흥미로웠다. 범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젠더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해,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 말을 쓴 뒤 3개월 뒤, 이 글을 쓴 사람은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참작해 그는 과실치사 법규가 적용되었다. 저자는 “사법제도가 오랫동안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해왔다”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이며, 이 점은 사법제도가 참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죄질이 더 나쁜 살인자들을 걸러낼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범죄에서 출발하지만, 인간의 내면, 그 결과로 일어난 잔혹한 사건들(히로시마 원폭, 아우슈비츠 등),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까지 담아낸 훌륭한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전공수업에서 배우는 경계성 성격장애, 양극성 성격장애, 해리 등 친숙한 용어가 나와 반가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대학교 2학년 때 이상심리학이라는 수업을 들어두었던 것이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학점은 C밖에 받지 못했지만..
일독을 권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