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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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을 2년 반 썼다. 주제 잡는데만 1년을 그냥 보냈고, 자료조사하는데 1년, 집필하는데 한 학기를 보냈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박사논문으로 상을 두 개 받았다. 하나는 학교에서, 다른 하나는 학회에서.
이 논문 제목처럼 이상한 제목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은 PPP 는 public private partnership의 약자로 민관합동사업을 말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는 '공간생산'(production of space)을 partnership 대신 썼는데, 당시 지리학 박사과정이었던 미국인 친구 Jay 가 제목을 정하는데 많이 상의해주었다. Jay와 새벽 3시까지 곱창집에서 소주 마시면서 샬라샬라 되도 않는 영어로 학문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떠들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박사논문 쓸 때도 그렇게 우울하진 않고 즐거웠던 것 같다.
원래 박사논문 심사 과정은 힘들기로 악명 높다. 심사위원들에게 잘근잘근 씹히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도대체 이게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를 정신없는 날들이 펼쳐진다. 울면서 밤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럭저럭 지나갔다. 발표도 그럭저럭 했고, 질문이 나왔지만, 그렇게까지 공격적이진 않았고, 심사 때도, 뭐 어차피 너는 이번 학기에는 통과할 것 같으니 열심히 고치라는 말도 들었다. 게다가 (물론 부끄럽긴 하지만) 영어로 논문을 썼기 때문에 약간의 프리미엄도 있었다. 잘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인이 영어로 꾸역꾸역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구글 번역기가 성능이 좋지 못해서 시제 동사 찾아가면서 꾸역꾸역 썼던 기억이 있다. 어차피 학술적 글쓰기는 누구의 모국어도 아니란 말이 있다.
내 논문을 외국에 무슨 대학에서 좀 보내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논문 잘 봤다고 문자 메시지 보낸 사람도 있었다. 당시 나는 내가 뭐 대단한 것이나 된 마냥 우쭐한 기분이 들었지만, 취업에서 몇 번 실패하니 우쭐함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잘 알겠지만, 나는 직장을 찾아 포닥 자리를 휙 떠났고, 학계가 아닌 어디 이상한 곳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다시 연구원으로 일하기 위해서 내 박사논문을 발표할 일이 있었다.
수많은 공격이 쏟아졌다. 제법 시간이 지난 연구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비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financial geography가 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진짜 순수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정치경제학에서 금융화(financialization)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금융의 역할의 비대화를 지칭하는 말이고, 공간을 통해서 이와 같은 금융화를 증명하겠다는 이른바 급진지리학의 논의에서 '금융지리학'은 제법 자주 언급된다. 이걸 알리가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독서 부족을 탓하진 않고, 아무리 설명해도 "너는 금융과 재무를 모르면서 이상한 워딩을 만들었다."는 시선을 보냈다. 억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번번히 이런 씨름 끝에 낙방을 했다.
지리학도 모르는데, 급진지리학을 어떻게 알며,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투자전환이론을 모르는데, 어떻게 다음 논의가 된다는 말인가? 그들은 섣불리 내 이야기를 재단하고, 깎아내렸다. 이해한다. 나도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깎아내리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름도 다 알고 있으니, 언젠가 만나면 따지려고 한다.
어쨌든 박사논문 과정을 통해서 나는 재무제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순현재가치, 내부수익률도 엑셀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게 뭐 별거 아니라고 하면 아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말만 열심히 떠들지 이걸 구하는 방법을 자신있게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알고 나면 어려운 건 아니다.
돌고 돌아 나는 어쩌다 내가 박사논문에서 비판해마지 않았던 그 '정부'의 일부가 되었다. 수요추정을 해야 하고, 또 경상수지 분석을 통해서 타당성을 검토한다. 나중에 누가 박사논문을 쓰면서 내 이름으로 나간 보고서를 입수해서 수요가 과대추정되었다고 비판하는 논문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좀 웃긴 것은, 타당성 검토를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헷갈려 한다. 우리는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가치관이 흔들릴 때 공공조직은 책을 펼쳐서 읽거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지침을 읽는다. 법과 지침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절차를 얘기할 뿐 철학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업무를 하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래서 법을 바꾸자, 지침을 바꾸자 하면, 돌아오는 답은 "우리가 어떻게 법과 지침을 손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야금야금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박사 논문을 쓸 때는 잘 모르지만, 다 쓰고 나면 그 논문이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쿨하게 "지리학 박사지만 지리 잘 몰라."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회사에 한 명 밖에 없는 지리학 박사이고, 명함에도 지리학 박사라고 파 놓고 다닌다. 누가 박논 뭐 썼냐고 물어보면, 민자사업을 금융지리학적 관점에서 조명한 논문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일도 행정, 재무 쪽에 가깝다.
얼마 전 대학원생이 질문했다. "취업이 쉽지 않은 걸 아는데, 박논 쓸 때, 박논만 준비해야 하나요, 아니면 취업도 같이 준비해야 하나요?"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 아픈 질문이었다. 그 말을 하는 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대학원 졸업해도 직장에서 얼씨구나 반겨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아마도 열심히 하는 학생일 것이 분명했다.
내 대답은 이랬다.
"박사논문은 인생에 한 번 쓰는 거니까, 올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시간적으로 좀 늦어지더라도 정말 박사논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더 남는 투자일 거에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순수하게 2년 반을 갈아 넣었으니까. 당시 나는 아이도 둘 있었고, 집안 사정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어도, 그냥 지나올 수 있었다.
내 논문의 수준은 내가 알기 때문에 쑥스럽지만, 그래도 2년 반을 갈아서 쓴 건 부인할 수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치인을 찾아가고, 기자를 찾아가고, 공무원을 만나고, 은행원과 증권맨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면서 글을 썼다. 내가 글 쓰는 원동력도 결국 미우나 고우나 그놈의 박논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뒤로 갑자기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바람에 금융지리학을 정착시키겠다는 꿈은 실현시키지 못했지만, 금융과 지역 언저리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실무에서 싸우고 있다. 아마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박논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