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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Nov 16. 2023

전쟁을 보는 시각: 진보와 보수

람보를 보는 시각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낯선 사람이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떤 이의 이름을 수소문한다. 

수소문한 이는 죽었다고 한다. 

(실제로 베트남 참전용사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그는 말을 한 지 오래되어서 어눌하다. 

동네 경찰관은 그가 말이 어눌하고,

이상해보인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가둔다. 

사실 그는 전쟁에서 단련된 살인기계이다. 

동네 경찰관은 사람을 잘못 건든 것이다. 

더 이상 영화의 스포는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전쟁 후 스트레스를 다룬 영화, 람보이다. 


포스터만 봐도 엄청나게 강인함이 느껴지는 이 아저씨는 

(겉으로 강해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사실 울보이다. 

1968년 한국에서는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지만, 

전 세계는 혁명 분위기였다. 

프랑스에서는 드 골 정부에 반대로부터 시작해서 

노동자, 학생이 시위를 이어나갔고,

이 시위는 급기야 폭력을 동반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글귀를 본 적 있다. 

"'68혁명은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등록금 투쟁을 독려하는 학생운동 포스터였다. 

실제 낭트대학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킨 이유는 대학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드골은 68혁명을 계기로 실각한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미국은 독특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전 참전 문제였다. 

"베트남전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반전은 아주 그럴 듯한 명분이었다. 

또 하나는 인종문제이다. 

인종문제는 단순히 아프리카인들이 미국에 노예로 잡혀왔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아프리카계 후손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즉, 인종문제는 인종과 가난, 그리고 조금 데이비드 하비 식으로 표현하자면,

도시문제이다. 

특정한 공간이 게토가 될 수 밖에 없는 도시구조가 인종문제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여튼, 

미국에서는(물론 비폭력 시위도 있었지만), 

일부 도시에서 소위 말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육군까지 동원될 정도였다. 

참전군인이 돌아왔다. 

이들에 대한 시선은 둘로 나뉜다. 

혁명의 분위기에서 '반미', '반전' 정서에 휩싸인 사람들은

참전군인을 조금 불편한 눈으로 바라본다. 

전쟁은 일상과는 다르다. 

사람이 다치고, 죽어야 한다. 

참전군인이 살아돌아왔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는데 동참했다는 의미도 된다. 

다른 한 편의 사람들은

참전군인의 '희생', '노력'을 미국사회가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베스타 스탤론은 그의 자전적 다큐, "슬라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슬픈 엔딩이 싫어요.(I just hate sad endings, sorry.) 

어쩔꺼요?(Shoot me.)


람보 4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베트남 참전군인 

"람보"는 심하게 상처를 입어

안락의자에 앉아서 영화가 끝난다. 

실베스타 스탤론은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CG를 넣어서 안락의자가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 살아 있게 만든 것이다. 

실베스타 스탤론은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PTSD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람보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을 보는 하나의 시각은 그것이 온전히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당시 냉전 상황 속에서 쿠바사태에서 보듯, 

당시는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저 멀리 남의 나라(베트남)에서 자유주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베트남 공산주의자와 싸우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전쟁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은 때로는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총기소유를 보는 관점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이들은 '정의'를 위해서는 때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공산권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이 그럴듯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참고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실베스타 스탤론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레이건 대통령 때였다. 

강한 미국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던 공화당의 성향과 

액션 히어로들은 시대가 낳은 이란성 쌍둥이인 것이다.


또 원작의 람보는 

전쟁 후에도 작동하는 살인기계라는 컨셉이었다고 한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연기한 람보는

PTSD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이었다. 


그는 관객이 람보를 불쌍하게 여기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세상은

고뇌에 차서 무언가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강함'을 추앙하고 마키아벨리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살 수 밖에 없으므로,

둘 다 이해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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