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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May 23. 2020

노무현 전 대통령

페이스북 포스팅으로 그 날을 상기하게 된다.

날짜를 계속 쳐다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일을 하면서도 어딘가 찝찝했다. 뉴스 사이트를 접속해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페이스북에 들어가보니 예전에 내가 썼던 글이 나왔다. 수정 없이 다시 공유한다.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쓴 맛이 없었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한창 논문 쓸 때였다. 금요일 저녁 A와 술을 마셨고, 인천 사는 A는 내 자취방에서 같이 잤다. 9시 30분경이었나, 습관처럼 텔레비젼을 켰는데 "노 전 대통령 자살"이라는 글자가 비현실적으로 각막에 박혔다. 광우병 사태가 지나갔고, 촛불집회는 들불처럼 번졌고, 명박산성에 아침이슬 드립에 정신이 없었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미묘한 기싸움 끝에 끝내 전직 대통령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나는 이 싸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석사논문에 몰입하면서 애써 저 사고들을 외면했다. 어차피 내가 나선다고 바뀔 건 없으니까. 오늘처럼 약간 후덥지근 하다고 생각되는 아침, 비현실적인 뉴스와 함께 수많은 이미지들이 교차했다.


아무리,


권 여사가 검찰에 조사를 받게 되어 있기로서니 '자살이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검은 옷을 주섬주섬 입고, 일하러 나가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다들 말은 없지만, 어딘지 무게가 실린 표정으로 걸었다. 나는 서울대입구역에서 교대역까지, 교대에서 대치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평소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느 누구도 '노무현'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에 후배 B를 불러서 12시에 녹두 "와돈"에서 3900원짜리 삼겹살 2인분을 시켜놓고, 소주 세 병을 먹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그깟 논문이 뭐라고, 일이 뭐라고 하루종일 죽은 전직 대통령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음을 알았다. 심사를 앞두고 있었고, 주말에는 돈을 벌고 있었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시기라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아직도 그 날 하루를 떠올리면, 소주 첫 잔이 생각난다.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쓴 맛이 없었다.


노무현.


88년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때, 그는 청문회 스타가 된다. 아직 서슬퍼런 노태우 정권 하에서 전 정권의 실세들을 앉혀놓고 거침없이 쏘아붙이던, 부산출신 국회의원의 이름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는 현실의 인물인 것 같지 않았다. 청문회 스타가 된 이후, 나중에 그가 여러번 부산에 출마해 낙선한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지역주의와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2002년, 그는 거짓말처럼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거짓말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노무현을 다 싫어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 부자인 사람,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강원도 사람, 교수, 학생 거의 모든 계층에서 성토가 이어졌다. 싫어하는 이유는 제 각각이었다. 아무튼, 민심은 심각하게 이반했다. 나는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욕하지 않음으로써 의리를 지키려고 했다. 나는 힘없는 학생이지만, 내가 뽑은 대통령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순진무구한 생각이지만, 나는 그 때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 한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욕하던 사람은 2-3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으니까.


그가 가시는 날, 민주당 백원우 전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은 사죄하라!"고 고함을 질렀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보안요원에 의해 끌려나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등장할 때 (일부) 사람들은 등을 돌렸고, 그가 연설할 때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로,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를 보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이미 가고 없었다는 것이다.


변모는 "노무현이 자살했는데, 왜 내 세금을 써야 하냐"면서, 국가 세금이 한푼도 장례식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이 죽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고 하자, 보수세력들은 "그럼 죽은 사람은 비판할 수 없다는 말이냐"고 비아냥댔다. 변모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다.


'산 변희재가 죽은 노무현을 다시 죽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처참한 하루도 지나갔다. 나는 집 근처에서, 광화문에서 각각 한번씩 추모했다. 우리처럼 젊은 부부들이 눈이 시뻘개져서 들어와 아무 말도 못하고 꾸역꾸역 눈물을 참으면서 절을 하고 갔다. 나는 그 장면을 소리로 기억한다. 여기저기서 참다 만 울음소리가 들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여러 욕설이 같이 들린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어김없이 소주잔을 입에 대고 있었다.


벌써 4년이나 지났나. 그랬겠지, 싶다. 총각이었던 나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니까. 아직도 노무현, 보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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