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변증법: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Representations of space, Lefebvre (1991: 38–9) suggests is the dominant space in society and is a conceptualised space constructed out of symbols, codifications and abstract representations.
represent 표상(), 언어학을 배울 때, represent, denote, designate가 사실상 같은 맥락이었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지칭한다'. 예컨대, '사과'라는 단어는 실제 존재하는 사과를 '지칭한다'는 식이다. 만약 A word represents a thing.라는 문장이 있다면, '단어는 사물들을 표상한다'고 번역해야 할까 그냥 '단어는 사물을 지칭한다', 혹은 '단어는 사물을 가리킨다'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represent는 present와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재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도 맥락에 따라 잘못 사용하면 이상하다. 한 단어가 한 사물을 지칭한다는 언어학의 기본 이론은 "재현이론"(representation theory)라고 하지 않고, "지칭이론"이라고 한다.
앙리 르페브르의 (i)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 of space), (ii) '재현의 공간'(space of representation). 솔직히 말하면, 그토록 신비하고 많이 인용될만큼 좋은 개념인지 잘 모르겠다. 어떻든 해석을 해보자면, (i)는 공간이 무엇인가를 가리킨다는 의미일 게다. 예컨대, 이 공간은 공원으로 이용하라는 계획가의 정언명령() 같은 것을 말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서, 문래동의 예술가 마을은 (ii) 재현의 공간이라고 한다. 즉, 누군가의 이상과 상상이 가리키는 대로 공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i)보다는 (ii)가 더 좋은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런데, 궁금하다. 먼저 "재현"이라는 번역어는 원전의 의미를 그럴 듯하게 살리고 있는가 이미 말한 것처럼 재현은 "represent"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번역어이다. 왜냐하면, represent를 "재현"이라는 번역어는 역자가 present와 represent를 명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모든 경우에 represent의 가장 좋은 번역어가 재현인 것은 아니다. 불어 원전을 보고 르페브르의 의도를 간파하면 좋겠지만, 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까지 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통상적으로 쓰는 '재현'이라는 번역어가 이 경우 르페브르에게도 적용되는지에 대한 한 점의 의문만 남겨둔다.
좀 더 본질로 들어가서 '공간의 재현'과 '재현의 공간'은 가능한 개념일까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나는) 존경하지는 않지만 영민한 어떤 노교수가 말하기를, "공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 위에서 뭘 하는 건 인간이다"라는 짧은 말 속에 상당히 많은 진리가 들어가 있다. 물론 그 교수는 "환경결정론은 고스톱이다. 잠깐 스톱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환경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공간이 무엇을 재현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다. 공간은 인간의 의도를 매개하지 않고서 스스로 어떤 것을 지칭을 할 수 없다(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공간이론과 언어이론은 상당히 닮아있다). 결국 공간의 재현은 공간계획가의 의도를 재현한 것일뿐, 공간자체가 무엇을 재단하는 일은 없다. 결국 모든 공간은 '재현의 공간'이다. 대개의 이론이 그렇듯이,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에서 나타난 공간의 재현과 재현의 공간은 '앞의 공간'(공간계획가)과 '뒤의 공간'(진짜 도시공간)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한 라벨링일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앙리 르페브르가 주로 활용한다는 변증법적 방법론, 결국 정명제와 반명제에 들어가는 첨가물(단어)의 성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의 논의는 별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