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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Nov 18. 2015

우리 적이형이 착해지고 있어요 ㅠ

이적: 다행이다. 

지난 시간에 착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는 사실 노래 가사의 주된 메뉴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30대 초반 분들이라면 김민종의 불멸의 히트곡 중 하나인 착한 사랑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네요. 그 중 가장 핵심 가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죠. 

그대여, 난 오늘도 너무 괴로워하는 나를 달래보고 있지만.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과연 "착한 사랑"에 등장하는 남자는 착한 남자일까요?  30대 중반의 아저씨의 못된 시각에서 볼 때 노래의 화자는 "착하다"는 느낌보다는 실연 당한 술 취한 남자라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아마 30대 중반의 아저씨의 영혼이 맑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요.


지난번 글에서는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이라는 노래를 다뤘는데요. 사실 시간이 없어서 심층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성시경 코드는 '착한 남자'라는 겁니다. '너의 모든 순간'에서 보면 화자는 상대에게 뭘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끔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 주어서" 바로 그 이유 만으로도 나는 벅차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상대가 여성이라면, 그 여성은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좋다는 뜻일 겁니다. 심지어 그런 상대를 화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고 합니다. 만지지도 않고, 강제로 어디로 데려가지도 않으며, 뭘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결혼만 하게 되면, 밥 해 달라, 애 키워 달라, 옷 찾아 달라고 말한다는 일부 한국 남성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죠. 성공적 차별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한 남자의 컨셉은 이적이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조라는 말이 좀 과하다면, 최고봉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패닉 시절 그는 UFO, 왼손잡이, 벌레 등의 곡에서 자신의 저항성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여담인데, 패닉의 벌레는 체벌하는 교사를 벌레라고 빗대어 표현한 노래이지요. 이 노래에 대해서 당시 pc 통신에서는 엄청난 찬반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패닉의 비판이 과했다는 측에서 반대파들을 공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네요.^^


아무튼 이적은 계속 착해집니다. UFO에 "살찐 돼지들과 거짓 놀음"이라는 과격한 가사가 등장했던 것에 비하면, "하늘을 달리다"에서는 겨우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두 다리 모두 녹아 내린다고 해도' 그대에게 달려 간다는 식으로 과격함을 무마해버립니다. 그의 노래는 '달팽이'에서 성장하는 청년으로 출발해, '왼손잡이'로 일탈하는 시늉을 보여주다가, '벌레'에서 일탈해 핫 뜨거 하며 돌아서서, '레인'에서 처량한 남자를 흉내내보고, 결국 '다행이다'에서 감성이 폭발합니다. 그는 진짜 멋지게 착해지는 법을 아는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2CaQFavPuk

거친 바람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게


거친 바람이든 젖은 지붕이든 그건 묘사에 불과합니다. 그의 핵심은 '당신은 무엇도 할 필요가 없고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나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겠지요?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의미'라는 것을 부여해줍니다. 여기에서는 '당신은 나에게 의미가 됩니다'라고 하지 않고,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건 이적이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많이 하고, 또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만들어온 가락이 없으면 쓸 수 없는 미묘하고 적절한 구절이라고 봅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사실 제가 성시경부터 착한 남자를 다룬 것은 이 구절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모든 착한 남자 노래 가사 중 최고봉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런지는 다음 시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김민종의 '착한 사랑'은 착한 남자 노래의 최고봉이 아닌 것일까요? 이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민종의 착한 사랑은 '너'에 대한 노래라기 보다는 이별 때문에 고통 받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입니다. 어쩌면 상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셈이죠. 


나는 그냥 니가 싫어졌을 뿐이야, 네가 괴로운데 어쩌라고?

결국 김민종의 노래는 여성에게 스스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줍니다. 내가 잠깐 당신을 사랑한 죄로 당신이 겪는 아픔까지 내가 같이 느껴줘야 한다는 거냐고 여성이 항변할 수 있겠죠.  

진짜 착한 남자 흉내라도 내려면 절대 여성에게 심리적 부담이란 것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진리이지요. 이건 어쩌면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음악의 생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심기를 거스리게 하면 100명의 팬을 거느리는 것보다 큰 파급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은 빨리 전염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심리를 읽을 수 있다면, 이적의 가사가 왜 착한 남자의 최고봉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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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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