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 지금 불알 두 짝 말고는 가진 것이라곤 없으니 / 이는 온 고을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상권, p.840)
★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손가락 한번 튕기는 순간에 불과할 텐데 스스로를 고달프게 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상권, p.978)
★ "남들이 꺼릴까 두려워하여 가슴속에 얼음과 숯이 들어 있는 듯,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흔쾌히 마음의 뜻을 따라 호방하고 상쾌하게 스스로 즐기며 자기 몸 이외에는 근심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권, p.484)
★ "사람의 한평생이 물거품이나 허깨비, 뜬구름 같은데, 어찌 깊은 산속에서만 살다 초목과 함께 썩으려 하십니까?" (하권, p.964)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을 잘 담고 있는 편찬자 미상의 <청구야담>입니다. 고전 자체에 친숙하지 않은 분들은 '야담'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서도 많이 생소하실 듯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조선 후기에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만, 이 정의만으로 야담이 지닌 복합적인 특성을 온전히 이야기하기는 조금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담'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며, 조정에서 다루는 '정사正史'가 아니라 '야사野史'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전래동화나 설화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되었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짤막한 문장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낯익은 듯 낯선, 조선시대 '이야기'의 집대성
그중에서도 <청구야담>은 <동야휘집>, <어우야담>과 함께 3대 야담집으로 일컬어지며, 조선시대 후기의 격동하는 사회상을 잘 담아내고 있는 서적으로서 그 위상이 결코 낮지 않습니다. 약 300개 가까이 되는 단편들에서는 양반 사대부부터 시작해서 머슴, 기생, 상인, 임금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논개에 대한 이야기나 <허생전>처럼 우리에게 낯익은 단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접해 본 적 없는 생소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러한 이야기들은 실제 역사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용으로 변하는 여자나 저승에서 차사로 취직한 죽은 친구 등 비현실적인 요소가 다수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허구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들에 쉽게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이라고 정의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전래동화'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이 '야담'들은, 마치 친구로부터 '이거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로 시작하는 소문을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다채로운 일상, 흥이 넘치는 상상력
인물들의 성격은 신분에 따라서 변하지는 않습니다. 주인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하는 머슴이 있는가 하면, 주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노비도 존재합니다. 또 이들의 공작이 성공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패해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듯 다채로운 인물들의 일상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잘 몰랐던 조선 후기의 모습들을 눈앞에 그리듯 떠올려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히 돋보이는 부분은 이들이 품고 있는 '즐거움'입니다. 저 같은 경우 고등학교 때만 해도 우리나라를 '한恨의 민족'이라고 부르는 기존의 시각을 접해 왔던 터라, 조선시대 이야기들은 전부 양반들이 유교를 따르는 딱딱한 이야기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상 고전을 공부하면서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우리나라 사람들의 주된 정서는 '흥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짧기에 즐겨야 한다는 요즘의 생각들이, 이미 이 당시 짧은 한문들에 다양한 형태로 담겨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측면에서 무의식 중에 갖고 있던 고전에 대한 '오해'를 해소시켜줍니다. 나아가 현대인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흥이 넘치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줍니다.
연구자의 지식, 체력, 의지가 다 갖춰진 현대 역의 끝판왕
형식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서, 이강옥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청구야담>은 기존의 번역본들과 다르게 가장 많은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 '버클리대본'을 번역한 완판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게다가 단순히 한 책만을 대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동양본, 국도본, 가림본 등 다양한 이본1)과 서로 대조하면서 한문이 이본마다 어떻게 다른지를 글자 단위까지 따져서 분석하였고, 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기본 프로필이 어떤지, 구절이 기존의 어떤 책에서 인용된 것인지를 자세하게 주석을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충실히 돕고 있습니다. 또한 한 이야기마다 뒤에 한문 원문을 그대로 덧붙여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원문과 대조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고전종합db 등 다양한 사이트에서 고전을 디지털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고전은 직접 책을 펼쳐야 하는 부분이 많아 노가다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이 정도로 충실한 번역을 진행하려면 연구자 개인의 고전 역량과 더불어 이 책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와 체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몇몇 오탈자가 존재합니다만, 상-하권을 합쳐서 약 2000쪽에 육박하는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서 고전 연구자 분들의 노고가 가히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수명에 달렸고, 가난하고 부유해짐은 하늘에 달렸지요. (...) 그러니 한때의 곤궁으로 어찌 평생을 단정하려 하나요?" (하권, 758p)
고전은 지금부터 몇 세기 전에 창작된 책이므로,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큰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변했기 때문에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몇 백 년 이후의 사람에게도 들어맞기란 어렵겠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전이 '우리랑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져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청구야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랑, 의리, 고뇌를 접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와 그들이 서로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딱딱하고 심심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나가는 한 편 한 편을 꼭꼭 씹어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아이디어와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