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소.
마음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도리가 아님을 알고 있소. 하지만 한껏 눌러 담았던 마음이 커져 저절로 붓은 움직였으니, 그대의 어깨만큼이나 넓은 아량으로 부디 나의 무례를 이해해주기 바라오.
그대가 사라진 후 몇 해가 지났소. 이곳은 여전히 아침에 장사꾼들 소리가 요란하고, 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처량하오. 나는 해가 뜨고 나면 마루에 앉아 마당에 핀 무명의 풀꽃들을 바라보곤 하오. 그리 한가로움을 달래고 난 밤에는 여전히 객들과 의미 없는 언행을 주고받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단지, 밤늦게 창호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가끔 묘한 기대를 품을 뿐이오. 거기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소. 그것뿐이오.
마지막 보았을 때 그대는 누워 있었소. 얼굴에 고통이 가득했으나, 그대는 안심하라는 듯 나를 보고 미소를 띠었소. 나는 그대의 입술에 일던 가벼운 진동을 잊지 못하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역시 잊지 못하오. 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알고 있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당장 그대의 병을 낫게 할 수도, 그대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것도, 그때의 나는 불가능했소.
어느 날, 그대가 사라지고, 나는 내 안에 있는 소중한 것을 도적질 당한 것처럼 텅 비어버렸소. 칼로 베어 피는 나올지언정 아픔 하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져버렸소. 그래서 잊으려 했소. 그대가 먼 옛날 몰래 손에 쥐어주었던 구슬 세 개를 반짇고리에서 꺼내어, 손에 얽혔던 그대의 온기와 감촉도 같이 아궁이에 던져버렸소. 아무 일도 없었다, 이곳에 그대라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잠시 여우에게 홀린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흐르고, 절기가 바뀌었소. 텅 빈 표정을 한 객들은 수도 없이 이곳에 들렀고, 나는 그들에게 똑같이 텅 빈 위로를 했소. 변한 것은 없소. 반짝이는 것도 없소. 모든 것은 텅 비어 있소.
그러다가 또 어느 날, 산을 넘던 와중 밤이 깊어 어느 초가집에 하루 묵게 되었소. 거기 주인은 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방 안쪽에 향을 피워놓고 있었소. 주인은 볼 일이 있다며 잠시 마을에 내려가고, 나는 밝은 것을 싫어하여 방에 들어가 장지문을 닫았소. 달이 밝지 않은 날이어서 망자의 방은 깜깜했고, 씁쓰름한 향 연기만이 방 안에 퍼지고 있었소.
나는 향을 머리맡에 둔 채로 바닥에 몸을 눕혔소. 서서히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소. 미처 잘 닫지 않은 장지문 틈새로 불빛이 길게 뻗어 들어오는 것을 알았소. 내 눈앞에는 하얀 향 연기가 퍼지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망자의 영혼처럼 뭉치고 흩어지며 끊임없이 움직였소. 그때 나는 그 연기를 실눈으로 좇으며, 지금 마음에 들어찬 것이 무엇인지 보려 했소. 정신은 점차 깊은 곳으로 잠기어 가고,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소.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더 먼 곳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소. 내 마음은 의미 없는 말과 의미 없는 감정으로 가득 싸여 있었소. 그것들은 거짓된 것이오. 거기에 진실은 없었소. 빛이 잔뜩 바랜 감정들을 하나하나 베어나갔소. 끝나지 않는 낫질을 한참 이어나갔소.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을 멀찌감치서 불렀소.
그대였소.
그대 생각뿐이었소.
아마 다시는 그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대를 만나던 그 기간 동안 일생의 운을 다 써버린 탓에, 아마 남은 여생은 그대와 만나지 못하는 불행으로 가득할지도 모르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죽고 싶어져 이튿날 집으로 돌아와 죽으려 했소.
그러나 마지막에, 나는 그대가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만 같았소. 그래서 그대도 똑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멋대로 그런 생각이 들었소. 어쩌면 죽지 않을 그럴싸한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그래도 상관없었소. 빛바랜 감정들은 겹겹이 마음을 감싸고 있고, 그 가장 깊은 곳에 여전히 그대가 있소. 그것은 진실이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이 편지를 쓰고 있소. 그대가 준 구슬들을 아궁이에서 다시 꺼내온 참이오. 구슬은 하나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소. 아직도 이승에서 쓸 수 있는 행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구려. 그 남은 행운으로, 어느 날 갑자기라도 그대와 다시 만났으면 좋겠소. 그때가 되어 상한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 작정이오. 그러니 그대도 열심히 사시오. 편지 색이 바래기 전에 적당한 때 돌아오시오. 하고 싶은 말은 태산 같으나 여백이 없어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