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여우 Jul 29. 2021

<스노볼 드라이브>, 조예은

참신한 시동, 밋밋한 드라이브

참신한 시동, 밋밋한 드라이브참신한 시동, 밋밋한 드라이브

'나는 이번 눈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이건 확신이었고 그래서 두려웠다.'(p.33)


<스노볼 드라이브>는 원인 불명의 ‘방부제 눈’으로 인해 재난 상황에 놓인 가상의 도시 백영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등장한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제각기 다양한 재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이번 작품은 극한의 추위를 배경으로 한 기존 작품들의 펜데믹들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유형의 재난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가려움과 두드러기를 유발하는 이 눈은 녹지 않을뿐더러 습기를 흡수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한동안 내린 방부제 눈은 강물을 마르게 하여 물 가격을 폭등시키는 등 많은 사람들을 비극으로 몰아세웁니다.


주인공 모루는 어느 날 자신을 돌봐주었던 이모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모루가 살던 백영시는 녹지 않는 눈을 매립하는 소각장으로 지정되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었던 모루는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쌓인 눈들을 처리하는 일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백영시에 모이는 눈 더미에는 동물의 사체에 사람의 시체도 몰래 섞여 있었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악취 속에서 위험한 일을 진행하면서도 모루는 줄곧 이모와 이모의 트럭에서 발견된 스노볼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이월은 모루와는 달리 부유한 집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백영시를 떠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 또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가정환경 상 행복하지 못했던 이월은 새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유언에 따라 그녀를 몰래 눈밭에 묻어주기 위한 여행을 떠납니다. 이때 도움을 주는 인물이 다름 아닌 모루의 이모 유진이었고, 갖가지 사건을 겪은 후 백영중학교 동창이었던 모루와 이월은 운명적으로 백영시에서 재회하면서 유진의 행방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단순히 재난 상황을 연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방부제와 같은 눈'이라는 특수한 소재로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이러한 소재는 작품의 상황과도 맞물려 초반 서사 전개에서도 상당한 긴장감을 줍니다. 특히 재난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백영중학교 학생들이 한여름에 내리는 눈을 보고 운동장으로 달려 나간 후, 피를 토하며 줄줄이 쓰러지는 부분은 영화로 접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영화만큼의 긴장감을 유발할 정도로 강렬한 장면이었습니다. 나아가 서로 다른 가정환경에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했던 두 주인공의 시선이 주기적으로 교차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중 배경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고,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이기심으로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진짜 재난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참신한 소재와 납득이 가는 설정으로 성공적인 시동을 건 것과는 달리, 정작 드라이브, 즉 작품의 중후반부 서사 전개가 상당히 밋밋합니다. 죽은 새엄마를 옮기기 위해 유진과 만나게 되는 부분까지는 그럭저럭 묘사가 긴장감 있게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전개는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줄곧 이어집니다. 특히나 중반부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 가장 긴박해야 할 유진과 이월의 위기는 오히려 작품에서 제일 심심한 전개가 이어집니다. 진부하고 신파적인 강도와의 싸움, 장구도 착용하지 않고 스스로 위험에 뛰어드는 주인공, 협박으로 차를 뺏는 두 주인공 등등 중후반으로 갈수록 이 작품은 초반의 설정이 뿜어내는 매력이 심하게 옅어집니다. 때문에 초반부의 탄탄한 설정을 통해 작품을 믿고 구매했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용두사미 구조에 많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엔딩 또한 열린 결말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언가 매듭지어진 느낌 없이 그저 이야기가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제목에도 들어가는 '스노볼'은 작품 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는 있으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색채를 띠지 못했고, 둘을 이어주는 중학교 졸업 사진이라는 소재 또한 그저 더 이상 서사를 전개시킬 수 없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결국 작품의 테마,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주는 여러 소재들이 특별히 다른 이야기를 확장시키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월과 모루는 결국에는 서로 간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월이라는 이름이 입춘을 상징하는 것처럼, 둘의 미래는 다소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뒷좌석에서 줄곧 여행을 같이 해왔던 독자에게는 처치되지 않은 눈더미가 창밖으로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모루가 초반부에 눈이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때 독자인 저는 향후 펼쳐질 전개를 기대하며 신났습니다만, 결국 눈은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끝나버렸기 때문에 드라이브는 다소 심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책은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재미라는 것은 단순히 오락적인 요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장을 넘기게 하는 힘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책이 이러한 재미를 갖추기 위해서는 탄탄하고 개연성 있는 플롯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청소년 소설을 비롯해서 최근에 등장하는 많은 소설들이 기존에 문학 계열에서 쓰이지 않았던 참신한 소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높게 평가되는 경우를 목격하곤 합니다만, 소재가 레벨 업이 되었다면 서사도 그에 걸맞게 레벨 업이 되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소재에 만족한 나머지 정작 내용에 소홀해진다면 어느 때든 독자는 작가가 몰고 있는 차에서 내리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안녕>, 박준-김한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