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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Sep 03. 2021

<천 개의 파랑>, 천선란

SF는 사라지고 몇몇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을 뿐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p.284)


사람 대신 휴머노이드가 경마 기수를 맡게 된 2035년. 경주마 투데이의 기수였던 휴머노이드 C-27은 스스로 말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납니다. 폐기 처분되려던 찰나, C-27은 로봇에 관심이 많은 소녀 연재에 의해 집으로 거둬지면서 콜리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사고로 잃은 연재의 어머니 보경, 전동 휠체어를 사용하는 연재의 언니 등등 작중 등장인물들은 서로 교감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완결된 구조로 마지막까지 끈기 있게

   SF라는 장르 자체는 그 역사가 꽤나 깁니다만, 과학(Science)과 문학(Fiction)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 모두 참신한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습니다만, 정작 서사의 측면에서 보면 빈약한 스토리 구조가 지적되기도 했죠. 이번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도 작품이 용두사미로 끝나지는 않을지 하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해당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마장'이라는 장소를 개연성 있게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곳 또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닭 요리 전문 식당이며, 문명의 발달이라는 설정을 과하게 풀어내지 않고 현실에 맞게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려 한 점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에 탁월합니다. 나아가 심사평에서도 언급되었듯, 다양한 작품들이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되었다가 결말로 가면서 점차 힘이 빠지는 데에 반해, 이 작품은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며 줄거리로는 확실하게 완결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용두사미라는 치명적인 지적을 피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F에서의 문학(Fiction)의 실종

   그러나 처음 이 작품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과연 이 책을 마지막까지 잘 읽어나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말하면 의문입니다. 문장들은 대개 가독성이 떨어지고, 등장인물 개개인의 이야기는 설령 찬찬히 뜯어보면 매력 있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다소 매력적이지 못한 형태로 전달됩니다. 연약한 존재였던 학생들이 경마장 주인을 상대로 '나쁜 짓 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주지 않습니다. 어떠한 복수나 응징이 공허하지 않게 느껴지려면 꾸준한 자료 조사와 체험을 기반으로 그 복수가 현실성을 지닐 수 있도록 이끌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 복수는 단순한 공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소설(Fiction)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말하'지 않고 '보여줘야' 합니다. 동물에 대한 윤리 같은 것을 이래라저래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도덕책을 읽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기왕 인물, 사건, 배경을 가져왔으니 그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잘 녹여서 독자에게 대접해야만 합니다. 어느 한 인물에 빙의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이야기하면, 갖고 온 인물, 사건, 배경들은 전부 장치에 불과하게 되어버리니까요.

   심지어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 또한 '부드럽게' 이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천 개'라는 단어가 쓰인 제목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데, 그것들은 단순히 시점 전환을 통해 나열될 뿐 자연스럽게 얽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빈번한 시점 이동과 가독성 떨어지는 문장에 지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컨대 SF가 기본적으로 과학(Science)과 문학(Fiction)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면, 본 작품에서는 우선 문학이라는 이름의 토끼를 놓친 셈이 됩니다.


    SF에서의 과학(Science)의 실종

   그렇다면, 과학(Science)의 측면에서는 어떨까요. 동물을 사랑하는 작가의 성격만큼이나 이 작품은 끊임없이 생명이 지니고 있는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이 동물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과정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정작 작품의 주축이 되어야 할 휴머노이드 서사는 너무나도 평범합니다. 휴머노이드 콜리는 연재와 은혜, 보경의 이야기에서 점차 감정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끝내는 달리고 싶어 하는 투데이의 열정을 감수하고 말에서 떨어집니다. 작중 가장 과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는 사실상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에 장치적인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과학이라는 이름의 토끼 또한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을 마지막까지 읽고 어느 정도 여운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콜리가 말에서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과 '인물들 간의 거대한 이야기'를 연결 짓는 기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을 '사랑'으로 결론짓던 무수히 많은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본 작품은 책 소개와 추천사에서 등장하는 부드러움과 찬란함은 엿볼 수 없더라도, 동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기존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좀 더 새롭게 진화시켰다는 점은 문학사에 부여하는 의미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책을 구입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작품이 문학사에 기여하는 바'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대다수가 평론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입니다. 일반 독자는 문학 작품이 문학사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학 작품에 본질적인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작품의 세계로 흠뻑 빠뜨리고, 그 속에서 독자들이 작품이 주는 은근한 메시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출간되고 있는 문학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작품들은 과연 몇 개나 될까요? 그러한 점에서 <천 개의 파랑> 또한 읽으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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