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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Jul 17. 2023

가장 완벽한 말 외 9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여름특집(상)

  머리말


    더웁습니다.

    1934년에 나온 한 잡지에서 '편집 후기'에 적혀 있던 말이었어요. 에어컨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그 해의 여름을 그들은 어떻게 났을까요. 2023년, 더위를 핑계로 글을 게을리 쓰다가, 몇 개 안 쓴 글들을 모아서 마치 처음부터 특집이었던 것처럼 '여름특집'이라고 써놓는 사기꾼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도 (상)이라고 써 놓은 거 보니 (하) 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은 양심적인 사기꾼 같네요. 누가 좀 잡아가주세요.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번아웃-번인


   "때가 되면 하게 된다고들 하잖아."

   "응."

   "지금이 그때야."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의 일을 상상해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을 상상해. 지금은 6월이니까 거기는 지금 겨울이고, 그치만 우리나라보다는 덜 추운 겨울일 거야. 그 지역 사람들은 아사도라는 이름의 바비큐를 먹는다고 해. 거기 사람들도 220V 전기를 쓴다고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어....... 하여튼 풀 죽어 있을 때 나는 구글 지도로 지구 반대편을 한동안 들여다보면서,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여기에 있으면 아무도 날 못 찾겠구나. 아무도 나를 못 찾을 만한 곳이 세상에는 존재하는구나. 그러면 오늘 아침, 점심, 저녁에 겪었던 모든 안 좋은 일들이 그냥 사소한 일처럼 느껴져.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






  가장 완벽한 말


   어떤 박사가 토론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박하는 사람에게 대꾸하지 못해 화를 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말만 하겠네.'라고 이야기하고는, 그날부로 집에만 틀어박혀 자신이 썼던 글과 내뱉었던 말을 수백 번, 수천 번 가다듬었다. 몇 년이 지나 그는 마침내 결과물을 들고 시험 삼아 AI와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단 몇 분만에 패배했다.

   상심한 그가 AI에게 '어떻게 해야 가장 완벽한 말을 할 수 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AI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완벽한 말을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이 완벽해지는 순간은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 완벽하지 않은 말과 완벽하지 않은 말이 서로 부딪칠 때, 그 짧은 순간 동안 말은 완벽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더 많은 대화를 하시기를 권장드립니다.







  투 제로


   "약해 빠졌던 주인공이 환생을 거듭해서 강해진다는 줄거리는 있잖아, 사실 판타지 얘기만은 아니야.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는 잘 몰라. 그래서 한번 실패해. 하지만 실패한 다음,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여러 상상을 해. 이번엔 다른 방법으로 해봐야지, 생각해. 그리고 다시 실패해. 다시 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이번엔 새로운 변수가 나와서 실패해. 그리고 실패. 또 실패. 실패. 거듭된 실패에 포기하고 싶어질 즈음 마지막으로 내디딘 발걸음이 마침내 성공으로 이어져. 알겠지? 노력이 꿈을 이뤄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꿈을 이룬 사람들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거야."







  상냥보험


   "상냥한 사람들을 위한 보험을 만들어야 해요."

   "뭘 보상해 주는데."

   "남이 부탁한 걸 거절하지 못했을 때 최대 50만 원."

   "오."

   "남을 용서했을 때 최대 1천만 원."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벌써 억만장자일 거야."

   "보험사가 그 말을 들었으면 바로 지급을 취소했을 거예요."







  꼭꼭 씹어드세요


    -그저 빨리 다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도 허겁지겁 보내버렸던 것 같아. 밥을 급하게 먹은 듯이, 지금 나는 좀 체한 기분이야. 사진이라도 좀 찍어둘 걸, 좀 더 음미하면서 먹을 걸, 시간을 급하게 먹어치우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와 통화를 하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또 한 차례 녹색불이 빨간불이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렇게 지금 이 시간을 꼭꼭 씹어먹어보려 했다. 아주 천천히.





  끊어진 염주


   팔에 차고 다니던 염주가 끊어졌다. 책상 밑으로 염주알 몇 개가 굴러갔다. 갑작스레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염주여서 지금까지 버틴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근처 절에서 나오신 스님으로부터 받은 염주였다. 같은 염주를 받은 훈련소 동기들은 기껏 받은 것이 먹을 수 없는 물건이라는 점에 불만을 토했으나, 나는 염주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파란빛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처럼 느꼈다.

   그로부터 몇 년. 총성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나는 줄곧 그 염주를 쥔 채, 그저 스님을 따라 하듯 염주알 개수를 세 나갔다. 하나, 둘, 셋......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비는 사이에 숫자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귀를 찢어버릴 듯한 폭발음이 들리면 이번에는 열, 사, 칠...... 하고 숫자를 세는 법도 잊어버렸다.

   전쟁이 끝나자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복구해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겹게 다시 찾은 일상 속에 어느새 각자 녹아들어 갔다. 팔목에 찬 염주에 대해 경위를 잊어버릴 정도로. 야근하는 날에 죽고 싶다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전쟁통에도 끊어지지 않았던 파란색 염주는 오늘,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었던 날로부터 딱 4년이 지난 오늘, 수명을 다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염주 알을 주워 모아 책상에 놓았다. 흠집이 가득한 염주알들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탁해진 바다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염주 끊어졌을 때, 라고 검색창에 치니 누군가가 남긴 글이 나왔다. 물건의 수명이 다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만일 염주가 끊어지면 감사를 표하십시오. 그 염주는 오랫동안, 당신에게 닥칠 수 있었던 더 큰 액운을 막아주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한껏 탁해진 염주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받을 수도 있었던 커다란 불행에 대해 생각했다. 염주알을 손으로 쥐고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날은 오래도록 감사를 표했다.





  여름 이불


    다시금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되었을 때, 엄마가 얇은 이불을 꺼내셨다. 나는 일거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거실에 깔린 매트리스와 이불을 보자마자 곧장 자리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나는 엄마랑 같은 이불을 덮었다. 선풍기가 한 대밖에 없었던 탓이다. 천장을 보며 내가 말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옛날에 할아버지 댁 갔을 때 생각난다."

    그때도 이렇게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밤인데도 매미 소리가 들렸다. 모기향 냄새가 어렴풋이 났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베셨던 딱딱한 목침을 떠올렸다. 어른이 되면 이렇게 딱딱한 베개를 베고 잘 수 있어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뭐 하고 계실까?"

    돌아가신 지 20년이나 된 지금 나는 문득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주 갑작스러운 생각이었다. 살아계실 때도, 돌아가셨을 때도, 그다지 감흥은 없었는데도.

    "주무시겠지."

    마찬가지로 엄마가 감흥 없다는 듯이 말했다.

    "거기도 낮밤이 있을까?"

    "으이구, 잠이나 자."

    시간은 벌써 열두 시였다. 선풍기로도 물리칠 수 없는 더위였던 탓에, 나는 어느새 이불을 엄마에게 양보한 채 잠에 들고 있었다.

    잠결에, 엄마가 이불을 내 배 위에 덮어주며 말씀하셨다. 배라도 덮어. 안 그러면 배탈 나. 그것도 무척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리라


   그들은 집으로 가던 도중 처음 보는 카페로 들어갔다. '리라'라고 쓰인 글자가 벽 한 귀퉁이에 걸려 있었다. 그는 등 뒤로 지고 있는 노을을 염두에 두어, '비추리라'의 리라일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옆에 있던 그녀는 '잊으리라'의 리라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자, 카페 주인이 '라일락'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럼 거기 사람들이 우리 보고 그러겠다."

   "뭐라고?"

   "저 나라 사람들은 다짐할 때마다 꽃을 이야기한다구."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여우비


   그가 빗길을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빨간 우산을 쓴 여자가 그를 보고 멈춰 섰다. 그도 어째선지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우산으로 눈을 가린 채 그를 향해 외쳤다. 붉은 입술만이 허공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일부러 불쌍한 척하려고 우산 안 쓰고 있는 거야? 그러지 마. 가증스러워."

   그녀는 웃기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는 반박할 기력도 없어 퀭한 눈으로 그녀를 향해 외쳤다.

   "약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죠. 저는 오늘도 사소한 일에 금세 마음 아파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같은 상처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어요. 그게 너무 부러워요. 너무 부럽고, 무서워요. 무서워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요."

   그러자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답했다.

   "먹이사슬로 봤을 때 여우는 호랑이보다 밑이야. 근데도 여우가 호랑이를 이겼다면 그 이유는 뭘까? 머리를 잘 썼기 때문이겠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려면 꾀를 쓰면 돼. 꾀가 있다면 배짱으로 밀어붙이면 되고."

   빗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그제야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그리고 우산이 천천히 걷히면서 두 눈과 두 귀가 보였다.

   "-여우야. 널 데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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