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상사, 나는 리액션봇

by 하늘자까

회사에서 받는 월급에는 노동력 제공 외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을까? 어떤 책에서 읽기를 감정 소모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 말에 공감했다. 세상엔 여러 회사가 있고, 대표의 스타일마다 다양한 조직문화가 있다. 그중 내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는 굉장한 애주가이며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다. 회식에 술 마시는 문화는 당연히 팽배한 것이고 관련 에피소드들은 술을 마실 때나 마시지 않을 때나 들어야 한다. 내가 이 조직에서 일하기로 했다면 받아들이거나 아님 내가 변화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서 술 취한 사람들을 회식 자리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시고 그저 그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었을 뿐이다. 직원들과 대표가 하나되어 취해있는 모습이나 십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내며 고등학생, 대학생, 사회초년생 시절의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모습이나. 그런 상황을 보고 들을 때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일렁이는 것이다.


평소에는 잠잠하게 잘 지내다가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그런 상황이 있곤 한다. 대표적으로 회식할 때, 그리고 갑자기 수다를 떨기 시작할 때다. 쌍뱡항 수다라기보다는 일방적일 때가 많다. 대표는 말하고, 직원들은 리액션을 하는 흐름이기 때문에. 그날은 대표가 오전부터 사무실에 있는 날이었다. 보통 12시쯤 되어야 "점심 먹으러 가시죠~"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오전 11시 16분이 된 시각에 대표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배가 일찍 고픈 날이 있을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근처 닭갈비집으로 이동했다. 철판닭갈비를 주문했는데 요리가 다 익는 데까지 한 40분은 걸리는 곳이었다. 그동안 스몰토크를 시작하려는 모양인지 그 닭갈비집에서부터 대표의 입은 드릉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과거 에피소드들을 나열했던 것은 아니다. 자기 개시라고 할까.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것을 들어 자조적인 이야기로 스타트를 끊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방들에게 웃음 포인트를 제공하는 것은 대화의 장벽을 낮추는 요소이기도하다. 나도 처음에는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얼굴 표정도 다채롭게 지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쌍방향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물론 나는 주된 관심사가 글쓰기인 사람이라서 대표와 같이 있으면 일 이야기 말고는 주제의 접점이 없어서 평소에도 거의 듣기만 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술로도 통하고, 옛날이야기, 연애 등으로도 통하는 게 많다. 직원들의 티키타카 속에서 나는 리액션 봇이 되어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래도 초반에는 그럭저럭 리액션할 만하다. 내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혀 흥미롭지는 않은 주제더라도 어느 정도 낯섦과 신기함이 있다. 그런데 그 수다는 닭갈비집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음식이 익기를 기다리는데 40분을 소비하고 먹는데 20분. 점심시간 한 시간 가량 중 50분을 소비한 셈이다. 큰 회사가 아니라서 점심시간이 칼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서도 보통 한 시간 안 쪽으로 먹고, 쉬고, 양치하는 것을 포함해서 마무리하는데 오늘은 좀 더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는지 밥 먹은 후 카페로 이동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조직이라도 모름지기 기준은 대표가 되기 때문에 '갑자기?'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발은 카페를 향하고 있었다.


카페에서도 40분 정도를 소요했다. 그 시간 동안 닭갈비집에서 드릉거리던 대표의 입은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이 옛날 에피소드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카페 안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3분의 2는 이미 들었던 에피소드들이었다. 한 이삼십 년 전의 일을 다시금 꺼내면서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 그렇게 재밌는 것들을 아니었다. 으레 학창 시절에 한 번씩 겪어봤던 경험담들이다. 게다가 몇 번이고 들어 봤던 이야기였기에 표정관리를 할 새로움도 찾을 수 없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으면 에너지가 빠르게 소진되는 나로선 그저 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애꿎은 티슈로 학만 접고 있었다. 느릿느릿 학 5마리 정도 접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해 주었을 때쯤 에피소드 타임은 마무리됐다.


물론 모든 조직이 내 맘에 쏙 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런저런 상황, 장단점을 따져봤을 때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 되는 부분은 있을 터. 아마 받는 월급의 적지 않은 부분이 노잼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리액션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노력은 한다만 에너지가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는다. 그것이 집에 와서도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에너지가 고갈됐는데 동생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리액션할 힘이 단 1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의 법칙이라고 있는 것일까. 참, 나도 재미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분위기 살릴 수 있게 잘 들어주고 싶은데 그것이 참 어려운 부분이다. '대표가 왜 저렇게 했던 말을 또 하면서까지 옛날이야기를 꺼낼까, 왜 자기의 생각을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주려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통찰력을 주고 싶기도 할 것이고, 지난한 워크 라이프 가운데 수다와 유머를 이용해 환기를 시켜주고 싶을 수도 있다.


그 이유를 깊이 있게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러한 모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수다를 통해 환기를 시키고 싶다면 동년배들과 하고, 아랫사람을 붙잡아 두진 말자. (왠지 돌아보게 된다..) 나도 내면의 에너지를 키워서 리액션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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