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한달간의 유럽여행과 이별
나는 지금 아프다.
계속 마음에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쓰라리다. 길었던 한 달간의 유럽여행의 후유증인지, 실연의 아픔인지 모르겠다. 이별노래를 들으며 위로받고 싶었는데 사실 구슬픈 가사에 비하면 그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엄마와 친구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고. 그런 거겠지. 그래도 나는 아프다. 내 마음은 계속 욱신거리고. 나도 안다. 나중에 돌아보면 분명 이런 일로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던 내가 이해 가지 않을 만큼 멀쩡하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을 거라는 걸 안다.
1년이다. 처음 그를 만나고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추억을 공유한다고 하기에는 초라하다.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설레었던 순간들, 같은 마음이라고 느꼈던 몇몇 순간만이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걸 붙잡고 “우리 이랬었잖아”라고 말하기에도, 누군가를 설득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나는 아프다.
금세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창피하다. 나와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웃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프다. 더는 내 기대와 설렘을 쏟아부을 상대가 없어진 상실감인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좋아했던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계속 아프다.
아픔은 나를 성장시키겠지. 삶 속에 가슴이 무너질 만큼 아팠던 순간들은 내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이 일을 겪고 나면 또 성큼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같은 아픔을 겪는 누군가에게 나중에 공감섞인 해결책을 툭 하고 던져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져 있을 수도 있다. 이것도 가치 있는 일이고, 인생의 배움이다.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없고, 상대방은 항상 내 마음과 같을 수 없고, 사람의 감정은 이토록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배우고 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그렇게 항상 나를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하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떠났다. 때로는 내가 먼저, 때로는 상대가 먼저 그렇게 멀어져갔다.
타인을 객관적으로 보는 건 쉽다. 내 일이 아니니까. 너무 밝히, 분명히, 혜안을 발휘해서 볼 수 있다. 사실 나를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그게 정답이라는 것도 안다.
내 머리는 안다.
아직 내 마음이 모를 뿐이다.
나는 빨리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며칠째 발버둥치고 있다. 한 달간 유럽을 다니며 매일 약 2만 보씩 걷고, 하루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날이 반복되고, 하루걸러 나라가 바뀌고, 매일 새로운 걸 보며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여행했다.
그리웠던 한국에 돌아온 날부터, 나를 반겨주는 가족들과 친구들. 익숙한 동네. 3일 만에 출근한 직장은 내게 빨리 적응하라며 재촉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유럽에서 보낸 추억을 같이 공유한 건 아니니까 당연한 거다. 그러나 나는 아직 유럽에서의 여독이 남아있다.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운 건 아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걸린 감기 때문에 계속 잔기침이 난다. 나의 유럽여행은 끝이 났지만 나는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계속해서 기침이 나고, 새벽엔 잠이 깨고, 집밥은 익숙한 듯 낯설다.
나는 아직 그가 나와 있던 이곳을 걸어나갔다는 걸 극복하지 못했다. 아무리 덧없어도 일 년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털고 일어날 수가 없다.
그래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벗어나려고,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봐도 계속 잔상이 떠오른다. 수시로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웃게 될 거다. “그땐 그랬었지.”라고 말하게 될 거다. 내가 왜 바보같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아파했을까? 라며 재미있어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그러는 것처럼. 나도 아마 미래에 타인의 객관적 시각으로 지금의 나를 보게 된다면,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지금 아프다. 유럽 여행의 여독이 끝나지 않았다고, 감기에 걸려 아프다고, 시차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장맛비가 내려 기분이 울적하다고, 핑계가 많은 게 참 감사하다.
나는 아프다. 그가 자꾸 생각이 나서. 나는 아프다.
오래전 브런치 작가가 된 이후로 여태껏 첫 글을 쓰지 못했다. 어서 써야지 하면서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마음이 꽉 차서 어딘가에 털어버리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항상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쓰고는 했는데, 오늘은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 내 마음이 아프다고.
장마비는 멈출 것이고, 긴 여행의 후유증은 사라지고 나는 일상 속으로 젖어들 거고, 그와의 이별에 아파했던 이 순간은 기억이 될 거고, 오늘 하루는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많은 날이 지나가겠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