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ia Lim Sep 15. 2022

산에 할머니와 금성.

다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산에 할머니와 금성.


나에게는 할머니가 여러분 계십니다.

친가에 지금까지도 할아버지 세 끼니를 책임져주시는 서울 출신의 깔끔한 손맛을 지닌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전에, 할머니 한 분이 더 계셨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에 관련된 마지막 기억은 새로운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할아버지네 마룻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사람은 종종 부재에서 잊었던 존재를 느끼기도 합니다. 새로운 할머니의 등장이 내 전 할머니에 관련된 가장 강한 기억일만큼, 전 할머니가 정정하실 때 나는 겨우 세 살 남짓이었고 주위의 착한 어른들은 세 살짜리에게 죽음을 가르쳐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전의 할머니에게 산에 할머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는 말이 여운을 남길 때마다 외할머니는 빙 돌아서 산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향을 풍겼습니다. 덕분에 최대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인생 첫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가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빠도 그의 딸과 어머니를 동시에 너무 아꼈기에 딸에게 할머니는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셨다며, 밤하늘을 보며 함께 찾곤 하였습니다. 혹시 그 제일 밝은 별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항상 할머니는 우리 주변에서 지켜봐 주시고 계실 거라는 얘기는 어쩌면 아빠 자신에게 해주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뻤던 추석, 본가의 하늘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고, 나는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은 금성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천체 중 태양과 달 다음으로 가장 밝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공기가 깨끗한 본가의 주택에서도, 자췻집으로 가는 퇴근길에도 금성은 항상 달의 조금 옆에 떨어져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항상 지켜봐 주고 있다는 생각은 혼자 걷는 길을 든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늘이 높아진다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에게 산에 할머니가 금성이라면, 아빠는 하늘입니다. 안에 자그마한 소란이 있던, 어떠한 변화가 있던 그저 모든 것을 다 품은 공간 자체인 사람.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묵묵히 한켠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가끔 아빠가 지쳐 보일 때마다 산에 할머니가 나 말고 아빠를 좀 빛나게 반짝거리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빠 마음속에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보다 소중할 테니까요. 비록 하늘과 별 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나지만, 열심히 살아서 얼른 조금이라도 그 감사함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오늘도 금성은 가장 밝게 빛나고 있고,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오늘 서점에서 오랜만에 다시 맞닥뜨린 나태주 시인의 시 ‘멀리서 빈다’를 인용하며 글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다들 가을입니다. 부디 몸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시인
작가의 이전글 파리에서 우동을. 이탈리아에서 치즈 부대찌개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