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e Me
가사는 슬프지만 멜로디는 신나는 빠른 템포의 노래를 좋아한다. 멜로디까지 슬퍼 버리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휘감겨버리고 말기에, 애초에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하나를 뚫어 놓는 것이다. 그래, 나는 그 정도로 겁이 많다.
세상에는 수많은 세상이 있다. 딱 사람 수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통찰력 있는 시각이나 논리적인 스토리라인에 큰 점수를 주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감정의 공유에 감사하는 세상이 있다. 퀄리티에 매진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담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숨길 수 없는 어색함과 서투름에 최고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세상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딱 인구수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중 나의 세상은 후자와 조금 더 닮아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약속으로 평소에 처음 가보는 곳으로 향했었던 날이었다. 멀었던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의 새로움은 지니고 있었다. 공기도 마침 그 주변의 보통의 나날보다 조금 더 추웠더랬다. 스윗소로우의 ‘첫 데이트’라는 콧바람 절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걷는데 이상할 정도로 발걸음이, 속력이 닮아있는 사람을 만났다. 다음으로 나온 노래는 유승우의 ‘헬로.’ 진짜 인사라도 해야 했던 것 아닐까. 다행히 내가 그분으로부터 가로수 두 개 정도 뒤쪽에서 걷고 있었기에, 의심받지 않은 채 완벽한 평행의 걸음걸이를 계속 관찰할 수 있었다. 그때부턴 그녀와 나의 서스펜스. 과연 누가 먼저 코너를 돌 것인가, 멈춰 설 것인가, 놓고 온 게 있어 뒤를 돌아볼지도 모른다. 나한테만 재생되는 앙큼한 스릴러는 나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어, 제대로 오고 있어?” 내가 먼저 끝내버렸다는 사실에 상심이 크다.
퇴근길에서 본 유퀴즈에서 인생을 장항준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라는 질문에 장항준 감독 본인은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어우 선방했다.”
너무 위를 보지 않고 나만 생각하면 너무 인생이 선방한 게 아닌가,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봐도 나는 내 인생이 너무 선방을 어퍼컷으로 제대로 먹여준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들의 눈에서 비칠 실망감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릴 수가 없다. 그게 또 그렇게 무서워서 열심히 정신없이 사려고, 혹은 그래 보이기라도 하려고 계속해서 틀 안에 나를 집어넣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막상 지진이 나면 아차 하며 지하철 입구로 헐레벌떡 들어가 버리는. 그리고 무너지면 또 아차 하고 말겠지. 욕이 아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나면 진짜 웃긴 놈이었어! 하고 너털웃음을 지어주는 세상도 있겠지만 진짜 어딘가 모자란 거 아니냐며, 나의 특징이 단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두려움과 겁이 계속 계속 힘을 얻는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매 순간이 행복하고 즐겁고 감동스러운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여유로움이 마음속에 가득 넘쳐나서 모든 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가을은 가을을, 여름은 여름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는 동안 나는 그 사이에 살짝 묻어 지내면서 다른 계절의 추억을 도울 수 있는 비닐하우스 같은 사람이 되겠다. 여름의 기억을 더욱더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여름의 과일을 조금 더 오래 품어주는 비닐하우스처럼. 나 혹은 내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따뜻했던 추억으로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삶을 살겠다, 오늘도 다짐만 계속해본다.
p.s.
본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남겼던 메모- 오글거리는 것에 면역이 약한 세상의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
귤색을 보고 처음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호박도 이쁘다. 아무리 취향을 바꾸려고 해봤자, 나는 세련되고 정돈된 우아함보다 뒤죽박죽 네추럴한 향의 빈티지 멋을 사랑한다. 둘을 세워 놓으면 분명 부끄럽겠지. 분명 내가 조금 더 어리숙하게 보이고 그들의 실버와 같은 차가움 매끄러움이 탐이 나겠지.
내일은 본가에 내려간다.
이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