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 할머니였다

by 길잃은 바다거북

친할머니,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 고모할머니, 외고모할머니…
무슨 음식점 메뉴처럼 재료 나열하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긴 이름표들을 달아주며, 마치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줄줄이 읊는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수식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분들은 그냥 내 할머니였다.

사람들은 수식어로 거리를 계산하려 한다.
피가 얼마나 가까운지, 가계도 어디쯤에 있는지.
그런데 마음은 그런 걸 따지지 않는다.
나는 안다.
어떤 수식어가 붙든 간에, 그게 꼭 멀다는 뜻은 아니란 걸.

웃기게도 저렇게 줄줄이 나열하던 사람들은
수식어 없이도 가장 가까운 피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멀었다.
서운했고, 차가웠고, 말없이 벽이 있었다.
그래서 난 깨달았다.

나는 마음이 가깝고, 피는 먼 가족들이 더 좋다.
그들은 굳이 ‘가족’이라는 말 없이도, 내 옆에 있어줬다.
태어나서 얻은 인연이 아니라, 살아가며 쌓인 관계였다.
고작 몇 글자의 호칭보다,
따뜻한 눈빛 하나, 손을 쥐어준 기억 하나가
훨씬 가족 같았다.

그리고 그분이 계셨다.
진짜는 수식어가 백 개가 붙든 천 개가 붙든 상관없다.
돌아가시고서 꿈에 나타나,
하고픈 거 하라고 조용히 종이랑 펜을 건네주시던 분.
내가 그 위에 글을 쓰자, 찬찬히 읽어보시고는
‘고생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신 그분.
그분이 내 진짜 할머니다.

수식어 따위 상관없다.
그분이 내 마음의 깊이에 남겨준 자리는
세상 어떤 족보보다 단단하고 따뜻하다.

그냥, 내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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