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 Badger Ginsburg, 그녀가 남긴 것
Ruth Bader Ginsburg, Notorious RBG로 더 잘 알려진 그녀가 2020년 9월 18일,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 미국 전역에 애도의 물결이 넘친다.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녀가 걸어간 발자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녀가 남긴 교훈은 앞으로도 우리의 곁에 남아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1993년, 미국 역사 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 임명되었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콜롬비아 로스쿨을 가장 우수한 성적에 졸업하고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학교로 돌아와 연구와 교육, 책 집필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스웨덴의 학교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스웨덴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것, 출산 후에도 사회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출산휴가는 커녕 여성은 남성 없이 집을 살 수도, 은행 계좌를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법관으로 임명이 되기까지, 여성 권리와 성평등에 관한 수많은 책을 집필하고, 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서 여성 권리 프로젝트를 지휘하며 여성 차별과 관련된 수백 건의 사건들을 도왔다.
부조리한 사회 문제에 거침없이 "I dissent" (나는 반댈세)를 외치는 그녀는 150 cm의 아담한 체구에도 거구의 보수진영들을 벌벌 떨게 했고, 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 여성 권리 운동을 대표하는 사회적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Ginsburg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남성이 받는 사회적 차별을 해결하면서 성차별이 마국 헌법에 어긋난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 사건이다. 1970년대 여성 권리 운동 (Women's right movement)의 열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이 받는 차별에 대해 외쳤으나 전원이 남성으로 이루어진 대법원에서 여성 차별의 이야기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이에 RBG는 부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남성이 Social security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건을 변호하면서, 젠더에 따라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 기준이 다른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결을 이끌어낸다. 이 판결은 전통적인 여성상(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남편의 월급에 의존)과 남성상(사회활동을 통해 가정의 생계를 책임 짐)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의 개선에 큰 역할을 한다.
Fight for the cases that you care about, but
do it in a way that leads others to join you.
여성 권리를 외치는 것은 남성의 권리를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특정 젠더에게만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인권 운동이다.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 출산 이후 사회생활을 논할 때 우리는 남성의 육아휴직과 군대 시스템의 개선에도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너의 문제는 내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며 각자가 가진 문제만 얘기하다가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Ginsberg의 또 다른 유명한 일화로는 남성들에게만 입학을 허락하던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 VMI)의 입학 규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 낸 것이 있다. 그것도 찬성 7과 반대 1로. 버지니아는 육체적 조건이 훌륭한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커리큘럼이 여성의 신체엔 적합하지 않다며 반박했지만, 법적 압박에 못 이겨 여군을 양성하는 별도의 학교 Virginia Women's Institute for Leadership, VWIL)를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VWIL은 기존 군사학교의 네트워크에 비해 그 기회가 제한적이었고, RBG는 이에 추가적인 혁신을 촉구한다.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입학할 만한 조건을 가진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 '여성은 이럴 것이다', '여성에게 적합한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일반화하여 이미 출중한 자질을 가진 여성들의 기회를 박탈해선 안된다.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는 서로 이해하고, 축복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특정 젠더를 폄하하고 그에 바탕해 개인의 기회를 억압하는 인위적인 제약은 용납되어선 안된다. 어떤 다른 대우든 그것은 여성을 법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처하게 하거나, 그 열등함을 지속시키는 데에 이바지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신체와 동일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평범함을 넘어 비범함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도전할 기회 조차 주지 않는 시스템을 문제 삼았다. 마침내 1997년, 30명의 여성이 VWI에 입학하여 남성과 동등한 대우와 훈련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20년 간 총 43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현재 입학생의 11% 정도가 여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2020년은 미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수많은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들이 남성 중심으로 틀이 짜인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 개정과 더불어 성평등에 관한 개개인의 교육에 힘 쏟았고, 페미니즘의 열기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뜨겁다. Citibank가 차기 CEO로 여성을 지목한 것, 민주당이 차기 대선의 부통령으로 Kamala Harris를 지목한 것은 여성 리더십의 부재에 목소리를 높여 온 대중들에 대한 보답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글을 쓰면서 우연히 연예인이 올린 개인 포스팅에 등장한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휴대폰 케이스가 문제가 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여성 우월주의란다. 결국 해당 포스팅을 삭제하고 해당 '사건'을 해명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미국과 한국의 확연한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인터넷 상에서 단순 혐오로 가득 찬 양 극단의 사람들이 서로를 비방하는 글이 난무하다 보니 여권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진흙탕 싸움이 되기 일쑤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목소리 내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일명 '할많하않' (할 말은 많지만 않겠다)의 태도를 유지한다.
우리나라가 성 평등 순위에서 144개국 중 108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 아닌가?'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전에 투표할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등이 자동으로 주어졌다.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 권리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나에게 대학 고등교육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졸업 후 취업해 남자들과 어깨를 견주며 경제활동을 하는 것 역시 당연한 권리였다. 기본적인 권리가 충족되었기에 그 이상의 권리는 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그저 뿌연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콘크리트로 된 천장임을 깨달았다. 여자 비율이 높은 의류 회사였음에도, 팀장 급 위로는 대부분이 남자였다. 여자 임원은 단 한 명이었다. 수직적인 기업문화와 야근을 견디지 못한 여자 동기들은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다. 여자들은 끈기가 부족하다며, 어느 순간 회사는 신입 사원을 남자만 뽑기 시작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에 들어섰다.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출산과 경제활동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 사상 최저의 출산율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능력 있는 여성들의 사회 경력 이토록 빨리 단절되는 것은 개인의 손실을 넘어 사회의 손실이다.
한국에서도 누구나 여성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길, 그리고 보다 성숙한 태도로 건설적인 정책이 논의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