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만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재 Oct 09. 2018

내성적 인간의 성장기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성장은 상처의 연속이었다. 유소년기에 나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이어서 무리 속에서 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나에게 가장 큰 콤플렉스는 외모였던 것 같다. 언제나 제일 앞줄에 앉는 외소한 체구에 머리는 부풀린 풍선처럼 컸고, 얼굴은 글쎄.. 가장 적절한 표현은, 성의 없이 만들어졌다. 빛을 감지하기에 필요한 만큼만 트인 눈, 탈모를 의심 받을 만큼 광활한 이마, 구멍이 아래로 향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낮은 코, 대충 만들어진 호떡이 연상되는 얼굴 윤곽. 더욱 슬픈 사실은 나에게 이런 것들을 아름다운 얼굴과 차별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늘 주눅 들어 있었고 특히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죄를 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고 입을 열 수 없었다.


청년기에 대학에 가고 나서는 집안의 경제력이 외모 이상의 콤플렉스로 부상하였다. 그 때 처음 강남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학교를 가는 버스가 강남을 지날 때 그곳에서 버스에 오르는 학생들의 “때깔”을 보게 되었다. 강남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생활방식과 놀이방식이 나 같은 전형적인 강북인과 차이가 있으며 우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 당시부터 회자되던 8학군이라는 지역을, 겉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결코 나에게 경제적인 불이익을 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안락한 성장기를 제공해 주셨다. 하지만, 나를 8학군에서 키우지 않으셨다는 점에 대해서 부모님을 살짝은 원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줄곧 수줍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어있었다. 무엇을 해도 나보다 잘하는 친구가 있는 법이고 어느 면을 보아도 나보다 잘난 친구가 있게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유독 아프게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의 부족함에 집중하였다. 그런 태도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었고 나의 내면을 감금하는 자물쇠로 작동하였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병적으로 미숙하였고 사회 안에서 겁에 질려 있었다. 사회와 나는 도저히 타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아마도 그에 대한 심리적 대안으로 내가 속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를 은밀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어느 정도는 정의롭고, 어느 정도는 까칠하고, 어느 정도는 비겁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나의 세계를 만들어 갔고, 그것은 의도치 않게도 나를 사회와 대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다.


흔히들 25살을 기점으로 육체적으로 꺾인다고 표현한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20대 중반은 어떤 기점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사춘기를 20대 초반까지 겪은 나는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을 떨쳐 버리는데 2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필요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온갖 존재론적 의심을 묻어버리고 학업에 매진하였다. 소위 말하는 성공과 출세의 이데올로기에 내 가치관을 팔아서 정신적 안락을 얻었다 하겠다. 성공에 대한 무거운 스트레스와 내적 압력을 가지고 살았으나 적어도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서서히 사회와 타협할 수 있었고 아주 느리지만 덜 수줍어지고 덜 주눅 들어갔다. 내 안에 내가 건설한 세계가 모습을 갖춰가니 바깥 세계와 이제는 타협에 들어갈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세계를 건설하고 바깥 세계와 교류하는 작업은 아주 오랜 과정이고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현재도 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20대 중반 이후로 줄곧 앞만 보고 한 방향으로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년이 되면서 육체와 정신의 허약에 시달려야 했고, 전문적 분야에서의 성공을 신앙처럼 숭배하던 가치관이 뿌리부터 흔들리면서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는 시련도 겪어야 했다. 지금도 그 시련은 수시로 나를 흔들어대지만 나를 주눅 들게 하지는 않는다. 이미 나는 내 안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재개발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여러 모로 새로운 청사진을 만들고 있지만, 바깥 세계와 교류하기에 충분히 견고한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 같다. 사회 안에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바깥 세계와 접촉하며 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보완하며 재건설해 가는 과정 말이다. 


아직도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미숙하고 사회 안에서 어느 정도는 겁에 질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린 시절에 비해 사람들 사이에서 훨씬 편안하다. 비교적 일관된 정체성도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 같다. 내가 살면서 무엇을 잘 했는지 또는 무엇을 잘못 했는지 따지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얼마나 편안하냐 하는 점이다. 성장은 상처를 축적한다. 결국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만의 세계를 건설해서 사회와 교류하고 이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다. 세계가 변화하듯이 나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50대 초반의 내가 서 있는 좌표이자 내가 지나고 있는 지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