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산만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재 Oct 09. 2018

노벨상 단상

나는 10월을 좋아한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 달콤한 멜랑콜리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매년 요맘때가 되면 10월과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한 가지 짜증스러운 일이 있다. 연일 이어지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그것이다. 일본은 요즘 거의 매해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내며 기초 과학 강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온 국민적 “노벨상 앓이“가 애국심, 민족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내며 독감을 앓듯 지나가고 있다. 이 정도의 파라노이아는 집단적 질환이라 진단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과학계에서는 예외 없이 진단을 쏟아낸다. 우리 정부의 연구비 제도는 하나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 연구가 불가능한 풍토를 만든다는 지적이 있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과학이 학문영역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제 발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 정부만의 오류라기보다는 전세계적인 트렌드라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과학 정책은 전통적으로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두었고 유행에 민감한 경향을 보여 왔다. 현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비해서 기초과학을 강조하고 있고, 이러한 정책은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기대와 환영을 얻고 있다. 하지만 기술 중심의 과학 풍토를 벗어나 기초 학문으로서의 과학이 언제쯤 견고한 뿌리를 내릴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다. 


기술 중심의 과학이란 연구를 하려면 돈벌이가 되는 연구를 하라는 것이다. 돈이 연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동기가 되는 연구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현대문명의 여러 편리함이 바로 이 돈이 동기가 되는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문적 활동이 어느 만큼 경제적 가치를 가지느냐로 가치를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개념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근본을 추구하는 학자들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학문이 지향하는 것은 파괴적인 힘을 갖는 발견이다. 우리를 둘러 싼 현상계에 관한 기존 개념을 깰 수 있는 발견, 지식의 한계점에 있는 문제에 관한 명료한 설명, 이러한 것들이 과학을 비롯한 모든 기초학문이 추구하는 목표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연구에서는, 그리고 경제적 이익을 동기로 하는 연구에서는 결코 그런 힘을 갖는 발견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과학이 올림픽에서보다 또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하여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이전의 많은 정부에서 과학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사유한 적이 없는 “기능인”들에 의하여 정책이 수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명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택한 사람이다. 과학적 지식이 과연 사람의 삶에 또는 생명계에 순기능을 하는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식에 대한 추구는 힘으로 방해해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한다. 학자들은 내버려 두면 된다. 그들이 알아서 중요한 문제를 찾아내고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시간과 돈을 주면 된다. 과거처럼 ‘너희가 해야 할 것은 이러이러한 것이야’라고 정해 주는 정책이 계속된다면 엄청난 양의 국가예산을 들여서 과학을 고사시키는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10월을 지키기 위하여 한 가지 더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국력을 대변하거나 과학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지도 않는다. 물론 민족의 우수성을 노벨상 숫자로 가늠할 수도 없다. 상을 받으라고 과학계를 지지하는 국가와 국민은 결국 상을 받으려고 연구하는 과학자와 같은 수준에 머문다 하겠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을을 즐기시라.

매거진의 이전글 내성적 인간의 성장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