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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재 Oct 09. 2018

밴쿠버행 18시 50분

밴쿠버 가는 비행기 10A에 앉아 서울을 내려다본다. 손바닥을 창문에 대니 서울은 겨우 내 손보다 조금 큰 도시다. 이마를 창에 붙이고 정신은 정처 없이 하늘을 유영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승무원의 옅은 분내가 경쾌하게 주의를 잡아챈다. 시선을 창가에서 실내로 돌린다. 여승무원은 앞에 종이를 내밀고 모국어로 이해 불가한 몇 마디를 건넨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분명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나, 갑작스런 언어의 습격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 위대한 능력을 놓쳐버렸다. 함박 웃은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탓한다. 분내를 잠시 옆으로 비켜놓고 그녀가 내민 종이 위의 글자에 집중해 본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저마다 먼저 관심을 끌겠다고 아우성이다. 흩어져 있는 단어들 가운데 9A라는 글자 밑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어, 이거 9A네요. 저는 10A이고요. 그녀는 당황하였으나 미모를 얼굴에 그대로 유지한 채 좌석번호를 확인한다. 죄송합니다. 착각했네요. 미모가 분내를 앞세우고 황급히 멀어진다. 당연히 9A로 갈 줄 알았던 분내가 반대방향으로 희미해진다. 잠시 의아해 한다. 작업이었나... 흠... 이런 거, 익숙하다. 그냥 미모가 아니고 사람 보는 눈까지 고급지군. 어느새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달라붙는다. 다시 창밖을 본다. 동쪽으로 이동하며 하늘이 빠르게 붉어진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인간의 피조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멀리 동해가 보인다. 인천발 18시 50분은 이제 북극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 한다. 급가속하여 궤도를 이탈했던 내 정신도 지구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10A에서 바라 본 세상은 내가 떠나온 세상보다 왠지 더 나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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