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시절이 있었다. 그 여정 내내, 가야할 곳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삶의 지형이 아무리 다채롭다 할지라도, 저 너머 어딘가에, 결코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그곳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한참을 달려와 주위를 살펴보니 올라야 할 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것도 아니란 걸 알아버렸다. 이걸 눈치채기까지 수십 년을 소모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삶의 지형은 과거와 같지 않다. 긍정적 변화도 있었고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변화도 물론 있었다. 안정감을 얻는 대신 열정을 지불했고, 사회적 지위라는 사다리를 올라간 대신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근본적으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같이 분노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기뻐하고 부끄러워하고 쉽게 매혹당하고 쉽게 상처받고 더 큰 욕망을 찾아 아직도 표류하고.
많은 현자들이 조언한다.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 심지어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타이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시원스런 정답이야 있겠는가? 나이와 경험에 따라 가치관이 변하듯이, 우리 인지의 한계로 알 수 있는 삶의 진리라는 게 고정되어 있으란 법도 없다고 본다. 우리는 탐구의 욕망을 타고 났으나 결코 만족할 결론을 얻을 수 없는 숙명도 함께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이 고통의 근원이고 번민의 배경이 아닐까?
결국 인간이라는 종은 하찮은 지혜와 욕심에 아슬아슬 매달려 문명의 가면 뒤에 숨어사는 동물이라고 규정해 본다. 빨간 숯으로 변하는 하늘이 시간을 끌고 어디론가 멀어지는 저녁, 어찌하지 못하는 조바심으로 차가운 밤을 맞으며 허무러짐을 반복하는. 나와 너를 이해하려 부단히 힘을 소비하며 결국 아무도 진정 납득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생명이라는 질기고 질긴 동아줄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나와 너, 인간이라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