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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재 Mar 20. 2020

역진화

개체의 발생과정에는 수억 년 종의 진화과정이 흔적처럼 묻어있다 그러니까 개체의 퇴화과정에서 역진화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두드러지지 않는 그러나 딱히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두드러지지 않는 그러나 딱히 뒤처지지 않는 초중등교육을 거쳐 두드러지지 않게 그러나 많은 날벌레들을 남몰래 뱃속에 배양하며 대학을 졸업하면서 발생과정을 마감한다 


성공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호흡하며 앞만 보고 질주하고 경쟁에 중독되어 나보다는 남을 이기려 지나친 곁눈질에 사시가 고착되고 세상의 저울위에 얹혀진 몸뚱이가 가라앉을수록 날아오르는 착시현상에 자신과 세상 사이의 공간은 왜곡되고 헝클어져 날벌레들의 날개짓에 먼지만 분분할 뿐 실재는 찾을 수 없고 힐끔 훔쳐 본 거울 속의 자신은 몸에 날개가 아닌 꼬리지느러미가 자라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멘붕상태로 젊은 시절을 마감한다 


멘붕은 혼돈을 잉태하고 혼돈이 혼돈을 먹고 자라서 자신이 살아온 햇수보다 더 많은 지느러미를 홀수로 가진 곤충을 출산한다 아니 이것은 일차원적 직선형 개체가 선을 벗어나 이차원의 면을 방황하는 개체로 탈바꿈한 것이니 변태라 해야 옳다 구조적으로 애초에 방향을 정하고 이동할 기능이 결핍된,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달고 난감한 곤충, 역진화를 염려한다 


생명과 삶, 그리고 본질, 감당조차 안 되는 단어들을 입술에 혀에 손끝에 정수리에 발바닥에 붙이고 다니며 영도 없고 혼도 없고 육도 없고 체도 없고 진도 없고 실도 없는 언어들을 말라 부스러지는 비늘처럼 날리며 주목을 구걸하지만 씻어내려 할수록 진해지는 냄새의 이름은 가식,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가진 곤충은 끝내 땅위에서 질식한다 역진화를 실행한다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겨울옷 한 벌 여름 옷 한 벌 꾸겨 넣고 속에서 썩은 비린내를 거리에 게워내며 도시의 습지를 유랑하다가 착한 마음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초라한 여인네 만나 술값이나 뜯어내다 어느 날 갑자기 몹쓸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없어지기 직전 눈물을 닮은 노래 하나 떨굴 수 있기를 환상하다가 결국 자신을 진정 사랑할 용기조차 결여된 불치의 질환을 진단하고 기왕에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지느러미에 맡겨진 목숨 비열하지만 당당하게 가식의 냄새를 세상과 교환하며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기로 한다 역진화를 완결한다 


평범함을 거부하며 평범함 뒤에 숨어 사는 개체는 실로 역겹고 한편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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