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의 예상 평균수명은 아흔넷 정도라는데 내 나이는 글쎄... 지금껏 대략 남들 하는 만큼 하며 살아 왔으니 수명도 그와 같다면 시작보다는 끝이 훨씬 가깝다 보는데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생로병사의 인과관계 속에 그저 대책 없이 늙어가는 것 이외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를 삶이라 규정한다면 누군가는 너무 비관적이다, 또는 염세적이라고 항의하겠지만 종교적 설명에 절대적 신뢰를 부여한 몇몇 이외에는 사실 냉정하게 말해 삶이 가지는 궁극적 지향점, 또는 의미라는 것은 이해의 도메인 밖이라는 의견에 많은 범인들이 동의하듯이 나 또한 감히 어찌 이런 심오한 문제를 논하겠냐만 삶이라는 것이 주어짐으로써 어디로 왜 가야하는 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 어이없는 딜레마 속에서 그래도 내 안에 야만과 사랑, 폭력과 연민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때, 아, 우리 모두는 인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을 부여잡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바라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가여운 존재들임을 깨달으며 그래서 더더욱, 가지가 거침없이 담을 넘을 때* 마치 어릴 적 장대비에 온몸을 맡기고 더 이상 망가질 일을 걱정할 필요 없이 뛰어놀 때처럼 통쾌했고 가지가 무명에 획을* 그을 때 비겁함의 창살 안에 감춰 둔 마음 속 짐승을 떳떳하게 공개했을 때처럼 속이 후련해졌으며 그런 길을 몸소 보여준 가지의 용기와 기백에 마음으로부터 조용히 찬사를 보내며 희망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이며 감성적인 개념을 아주 어렴풋이나마 형상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가지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를 표할 따름이다
* 정끝별의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