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 일부를
나는 모든 예술가의 명예와 재산
특히나 사랑을 총괄하는 지배인이 되어
그것들과 함께 땅 속 깊숙히 사라지고 싶은 영혼.
뮤즈보다도 뮤즈의 상실이 그들에게 더한 뮤즈인 바 나의 바람은 땅 위의 더한 아름다움을 위하여.
- 기꺼이 (2017.01)
죽음의 부재는 무엇이오?
"생의 부재는 죽음이요"
정적의 부재는 무엇이오?
"소리의 부재가 정적이요"
어둠의 부재는 무엇이오?
"빛의 부재는 어둠이요"
무(無)의 부재는 무엇이오?
"존재의 부재가 무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는 존재하오?
"이제 나는 고요한 어둠 속에 죽어 누워 있는 '무(無)'를 사랑하기로 했소"
- 사랑하기로 (2019.02)
육지에 두발 굳게 딛고
저먼 지평선을 바라본다
언젠가 꼭 한번 보았던
돌고래의 아름다운 춤을 기억한다
드넓은 바다 속 어딘가에
돌고래의 일상이 지금도 있다
무리들과 노닐면서 오늘도 아름다울
돌고래의 일상이 있다
- 異種 (2018.05)
밤은 그 누구를 내려다 보려고
우리 모두를 재우나
곤히 잠든 네 얼굴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 볼 수 있는
나는 밤이라도 되어야 한다
- 觀淫 (2017.07)
슬픔은 마음 가녘 여기저기 거스러미의 모양으로 자리 잡는다.
거스러미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엄지 마디 위에 거스러미가 있다면 약지나 새끼 어딘가에 분명 그 짝이 있다. 하나의 슬픔을 보풀 떼듯 조심스레 오려내고 나면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한 무리 슬픔의 표정이 먹먹한 이유다.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는 떼어내든 잘라내든 흔적이 남는다. 슬픔 역시 그와 같아서 떼어낸 자리엔 자국이 남는다. 자국의 모양은 슬픔의 원인처럼 제각각이다.
거스러미는 떼어지며 있던 터에 고통을 남긴다. 고통의 크기는 거스러미의 몸집과 관계하지 않는다. 아주 얇고 가는 거스러미를 떼어 낼 때 뜻밖의 고통은 종잇장처럼 예리하게 살갗을 파고든다. 가장 사소한 존재의 상실이 무엇보다 커다란 고통을 가져오는 이치다.
자신과 눈을 마주친 상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며 저의 이름값을 치루는 것이 거스러미다. 일단 보고나면 어떻게든 없애고 싶다. 하지만 거스러미는 그저 거슬릴 뿐이다. 거스러미가 거슬리면 눈길을 돌리면 그뿐이다. 슬픔의 표정을 주의깊게 살피려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침부터 해거름까지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롭다.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해서 거스러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까슬한 안감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들춰진 거스러미는 불쾌한 자극으로 저의 존재를 알린다. 지나치다 마주한 간판 글귀에서도 불현듯 슬픔이 찾아오는 까닭이다.
거스러미는 살갗의 일부요 피부의 일부요 결국 자신의 일부다. 거스러미를 베어내고 나면 나의 일부는 나에게 없다. 잊혀진 슬픔은 자신(自身) 의 상실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슬픔을 닭의 알처럼 품어야 한다.
내버려둔 거스러미는 자연히 사라진다. 눈 둔 곳에 있던 거스러미는 어느새 훈련받은 요원처럼 흔적이 없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존재를 감춘 거스러미는 더운 8월에 떠올리는 겨울과 닮아있다.
사라지고 만 거스러미처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슬픔을 잊고 말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자신을 상실했는가.
- 거스러미
생의 가장자리에서
생의 한 가운데를 바라본다
닿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은
공간 너머의 문제
나는 그옛날 한때나마 짧은 잠에 들었지만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는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너에게 닿는 일이 왜 잠이어야 했을까
이제 나는 살랑이는 바람조차 두려워 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 起牀 (201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