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를 신은 문장 -장석주

by 이영희


서점에 가면 나는 늘 내가 책을 선택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은 책이 내게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내며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내 느림을 어떻게 알고서.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장석주 시인은 느림이라는 주제로 내게 무슨 이야길 해주려는 걸까.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를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여유에 대해 생각해왔겠지만

정작 어디서 어떻게 진정한 여유로움과 느림을 구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 제목처럼 시인은 그 느림을 어디서 찾았을까.

나 또한 느긋하게 따라가 본다.


프롤로그 '장자에게 듣다'부터 에필로그까지 읽어내리며

'장자'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글에 어울리는 소박한 그림에 한참 동안 눈이 머물기도 했다.


가슴에 와 닿는 구절들을 박한 재주지만 옮겨 본다.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나는 시골에서 푸성귀를 뜯어먹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려고 애썼다.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돌보려고 애썼다. 참다운 느림은 느림을 누리려는 마음의 바탕에서 나온다.

마음을 돌보고 만물을 향하여 여는 게 느리게 사는 법이다. 마음을 열면 음악이 없어도 음악을 듣고 시가 없어도 시를 읽는다.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다면>

요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옛날의 서양 동화는 쓸데없는 공상과 연약함을 키우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런 동화책은 멀찌감치 치워놓고 아이들을 야생 노루처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게 하겠다.

들척지근한 서양의 동화책을 읽히는 것보다 차라리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칡뿌리 등을캐먹고 체온을 유지하며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유용할 것이다.


<아아, 장마다!>

제 덕이 얕고 기운이 탁한 사람은 여름이면 공연히 움직임이 많아 땀과 기력의 소모를 더할 뿐이다. 장마 때는 고요히 앉아 옛 시인의 시를 모은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며 제 삶을 돌아보기에 좋다.

간혹 널리 섭렵하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꼬는 자가 있지만 그건 뭘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널리 고금에 두루 통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맑고 고상해져 청고 한 인격을 갖추는 법이다. 비 갠 뒤의 청신한

기상과 솟구치는 파도의 기세로 세상의 변덕과 황폐함에 맞서야 한다. 땅을 뒤집는 뜨거움은 내 안의 뜨거움으로 견뎌 내고, 절망은 그것을 올라타 채찍을 휘두르며 건너가야 한다.


<숲을 떠나며>

숲 속에서 책을 읽다 졸다 하며 한나절을 보낸다. 이 숲 속에서 한가롭게 보낸 한나절은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던 뜨거움과 혼돈과 공기를 잠재우고 내면의 균형과 평화를 주었다.

이것으로 며칠 동안 엔도르핀은 부족하지 않겠다. 해가 설핏 기우는 기미를 느끼며 돗자리를 걷는다. 어둠 속에

오래 있던 눈이 빛의 광채를 가장 예민하게 느낀다. 마찬가지다. 무분별 속에서 벼린 분별이 지혜롭다.


<난 건달이 되겠어>

나는 너무 오래 일에만

미쳐 있었어.

흰 손 흰 얼굴은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데.

망상은 줄지 않고

미친 피는 잠들지 않아.

구름 구두를 신고

카페에 나가 에스프레소를 마실까.

카페 통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흘러가는 구름과

한가로운 거리를 내다보며

오후의 한때를 보낼까.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아가씨를 향해

휘익 휘이익 휘파람을 불면

아가씨가 뒤돌아 보겠지.

그러면 눈웃음을 치며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야지.

지금 시간이 있느냐고.

나와 함께

춤출 시간이 있느냐고.


8년 전에 안성에 내려와 집을 지었다. 나는 서른 즈음에야 겨우내 순정품純正品의 한 면을 스치듯 만졌다. 물병자리 남자로서 맞은 마흔은 많은 미혹들로 어지러운 생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아 흙이 견고하고 윤택한 대지 위에 집을 세우고, 아울러 물맛이 달고 맑으면 길 하다는 말에 따랐다. 물가 주민으로 살면서 마당까지 올라오는 잦은 물안개를 보는 것과 물안개 속을 헤엄쳐 오는 겨울 물고기를 만나는 일을 보람으로 삼았다. 고독이여, 나는 그대를 겨울 물고기라 부른다.

꽃 같은 세상에 와서 물가에 집 짓고 살며 천분天分인 듯 고독을 그대로 칭하며 말을 건넨다. 산수유나무보다

먼저 노란 꽃을 피운다면 고독이여, 나는 그대의 하늘을 헤엄치는 겨울 물고기가 되겠다.

그대여, 부디 하늘을 봐라. 물가의 히피족인 버드나무들 위 하늘에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가?

얼음의 시를 쓰는 겨울 물고기는 어느 땅에나 있다. 나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은 늘 현재로의 여행이다. 나는 고독의 원소. 고독의 관목 아래에서 웃고 우는 미생未生의 한 소년이다.


<장화를 신은 문장>

스물몇 해가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부랑자처럼 함부로 떠돌며 살던 그해

온몸을 칼로 깎던 학의 젊은 날들

스무 살의 경계를 넘어

막무가내로 술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온몸엔 괴로움이 고여 출렁거렸다

그때 괴로움들은 왜 그토록 많았을까

비 젖은 구두를 철벅거리며 귀가하던 나는

어두운 집 앞 골목 어귀에서 보았다

검은 유령처럼 비 맞고 서 계신 아버지를

나는 빗물 위에 문장 하나를 새긴다

누구나 고통스럽게 쓴다

자기가 살았던 만큼

누구도 자기가 살았던 것 이상으로 쓸 수는 없다

아버지는 내가 쓴 환멸의 문장

빗속에 장화를 신고 서 있는 문장

혀는 이미 굳고 퍼런 이끼가 돋아나기 시작한 문장

내가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문장이 빗물 위에서 흩어져간다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으면서도 마치

채무자와 같이 전전긍긍한다. 아들 앞에서 아버지들은 약자다. 세월이 흘러 내가 아버지가 되고 보니

나도 다를 바 없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들의 눈으로 보면 나도 부족한 점이 있을 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 두 아들에게 나는 어떤 문장이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할 따름이다.




여기까지.

페이지마다 귀퉁이를 접으며 내 맘에 꽂히는 문장을 표시했다.

그중에 아버지에 대한<장화를 신은 문장>,

이 시와 글은 매캐하며 뻐근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독의 의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아버지가 위대한 아버지로 기억되는 분도 있을 테지만 다른 분에게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아버지는 서 있기도 한다.


머리가 굵어져가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워내며

나를 키워주신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과 뜻이 왜 이리도 아리고 사무치게 하는지.

자식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자식의 즐거움이 또한 그러하기에.

자주자주 고독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그를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지 않고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러기에 저 위의 <장화를 신은 문장>은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나는

아들에게 어떤 문장으로 새겨지며 남게 될까.

걸어온 길과 아직 남은 길을 살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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