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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눈물 사이
사무치는 당부
by
이영희
Jul 5. 2019
나에게 고운 비단 한끝 있는데
털고 씻어 때깔이 으리으리해
한쌍의 봉황이 수 놓여 있어
그 무늬 정말로 찬란스러워
몇 해를 행담 속에 간직했는데
오늘 아침 임에게 드리옵니다
당신 바지 짓는 거야 아깝잖으나
남의 치마 짓게는 주지 마세요.
칠보의 빛이 엉긴 순금에다가
반달을 아로새긴 귀한 노리개
시집올 때 시부모님 내 주신 예물
이제껏 치마 끈에 차고 있었죠
오늘에 떠나는 님께 드리니
서방님 패물에다 섞어 차세요
길가에 버리 심야 아깝잖으나
시앗의 허리띠엔 채 주지 마오./
蘭雪軒[난설헌]
............................
불과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여인으로서
그 집안의 재주와 맵시, 시詩를 가졌으니
제도의 모진 굴레를 탓할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인인
그녀로서는 덧없는 여필종부의 물림을 꿈에서나마 과감하게 물리쳤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인. 이 점이 허 부인의 위대한 점.
새벽에 깨어 머리맡에 있는 책을 펼치니
'허난설헌'의 시.
아낙의 야무진 속셈을 묘사한 마음.
토라진 여인의 그림이 그려진다.
당신의 바지를 해 입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다른 여인의 치맛감으로 주는 것은 안된다는 사무치는 당부.
오늘날, 억압과 불쾌했던 제도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우리는
허난설헌의 치마 끝자락이나마 잡는
사유를 하고 사는지.....
‘시앗’은 ‘첩(妾)’을 뜻하는 고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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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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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즐깁니다. 수필집 <자궁아, 미안해> 2022년 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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