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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육은 돌려세워지지 않는다

by 이영희

새벽 두 시에 눈이 떠져 침대 머리맡에 쟁여놓은

책 중에 소설가 김훈을 다시 펼친다. 몇 번이고 봤던 문장이지만

꾸 되새김하게 만드는 글.

내가 몇십 년을 뭉게구름처럼 피워 올렸던 것. 그러나

적당한 수사나 어휘를 찾지 못해 아쉽고 뒤숭숭했던 나날들.

그것을 김훈은 내 마음을 꿰뚫어 서럽고 시리게 풀어놓았다.

노트북을 열어 그것을 옮긴다.


"..... 나의 형이나 아우도 같은 자궁으로 부터 서열대로 태어나,

나의 괴로운 한 구석이 저들의 한 구석과 닮아 있고, 때로는 버리고

떠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거덜 난 삶을 공유해 왔다는, 이 배반할 수 없는

생물적 사실이다.

그들이 나를 낳았고 고통스러운 삶의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물적 조건은, 인간이 인륜과 생활의 이름으로 그 위를 끝까지 걸어가야 할 길이고,

그 위에서 수만 년의 문명과 풍속을 건설해온 바탕이지만, 인간의 혈육 사이에

개입하고 있는 이 생물적 사실의 목메임에 가로막혀 생활의 길을 걸어가지 못한다.


가난하고 쓸쓸한, 또는 빼앗기고 능욕당한 삶의 자리에서, 나와 닮아 있는 내 혈육의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목메임인가.

인간은 혈육을 돌려세울 수도 없고, 혈육과의 사이에 생물적 조건을 쳐부술 수도 없다.

선으로도 패륜으로도 그 생물적 조건은 부수어지지 않는다.

혈육은 혈육과 함께 가야 할 인륜의 길을 차리리 혼자서 가도록 내몬다.

인간은 그 길을 혼자서 갈 수 없다. 돌려세워도 또 돌려세워도,

혈육은 돌려세워지지 않는다.


그 생물적 조건에 항거했던 불화와 등 돌리기, 살림 뒤집어엎기의 추억들은 또다시 그 생물학적

조건의 편이 되어 혼자서 가려는 인간의 허리띠를 붙들어 주저앉힌다.


제사, 세배, 성묘 또는 효도, 자애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수많은 통과의례들이 인간의

저런 목메임을 문명과 풍속의 이름으로 쓰다듬으며 왔지만 그 목메임은 너무나도

개별적인 것이고 짐승스런 것이어서 각자의 목이 따로따로 메일뿐, 너의 목메임은

나의 목메임에 대하여 무력하다..."





'돌려세워도 또 돌려세워도 혈육은 돌려세워지지 않는다'

이 말만큼 감정을 뒤 흔들고, 뻐근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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