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by 이영희

할아버지와 손자


흰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따라가는

들밭 풀 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제사 마친 늙은이는 두둑 길에서

손주의 부축받고

이달 <제총요祭塚謠>

**........... ....... **


해질 무렵의 저녁 빛이 빗기는 가운데 술에 까부륵 취한 할아버지와 손주는 누구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려 갔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왜 저물도록 무덤가를 맴돌다가 술에 취하고 말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그림 속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아이의 아버지다. 시인은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아이 아버지야말로 바로 두 사람이 제사지낸 무덤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무덤에 제사지내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싶어 말똥말똥 올려다보며 부축하는 어린 손주의 손과 천진한 눈빛,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슬픈 흑백영화의 한 장면같은 詩.


한 줄을 읽으면 머릿속에 따라 그려지는 그림들.

얼마나 내가 슬픈지, 얼마큼 마음이 아픈지 시시콜콜 감정의 바닥을 긁어내는 시 많다.

그저 신세 한탄일 뿐, 더도 덜도 아닌 말의 잔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했듯이 그럴수록 더 옛것을 자주 찾아 읽고 고전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좀 더 깊고 청량한 맛의 시와 산문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도 옛길 ,그 새벽 흙길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

빈 집

남편을 덜어내고 자식을 덜어내고

거실과 주방을 채운 먹거리와 장식들

책장 속 죽은 영혼들과 산 자의 이야기

다 털어내고 나면 나는, 나는 누구인가



색연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이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