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갈수록 꼬이고 환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글 읽는 시간은 꼬일 것이 없다. 자기 말을 길지 않게 할 줄 아는 작가들. 나는 오늘도 그들이 부럽다.
쓰고자, 그리고자 하는 대상들을 바짝 자기 앞으로 당기는 그 힘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양파처럼 벗길수록 시리고 아린 삶, 더하여 고이고 패인 인생의 단면들을 어쩌면 이렇듯 툭툭 털어 글로 장식할 수 있는걸까. 얼마나 마음밭을 매만지며 추스르며 한 편 한 편, 세상에 내어 놓는 걸까.
11월의 첫날을 황주리, 화가이며 수필가와
함께 열어 본다.
〈우물 속에서 해본 몇 가지 생각〉
사람이란 무섭게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어설피 외로울 때 사람들은 외롭다고 칭얼댄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사람은 동굴에서 혼자 살기도 하고 사막에서 혼자 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동굴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자신만의 서식지가 된다.
우물 속에 들어가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의 크기는 딱 우물의 지름만한 크기다.
사람은 모두 그렇게 자신만의 우물을 지니고 있다. 그 우물의 지름이 너무 크거나 작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어렵다. 그 크기를 비슷하게 규격화시키는 것이 사회이고 교육일지 모른다. 나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십 수 년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확실히 배운 건 구구단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꿈속에서도 구구단은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삶속의 구구단은 늘 틀리는 것일까.
〈무는 개가 되라〉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시인을 생각합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그 시를 읽은 이후, 날ㄹ 키운 건 팔 할이 고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조금쯤 덜 고독한 지금의 나는 서른 살 그 고독한 날들이 그립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내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는 개가 되라고. 그래야 돌아본다고.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은 제가 물기는커녕 물리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건 누구보다 당신이 제일 잘 아십니다. 제가 누구랑 싸워서 이기는 걸 보셨어요? 무는 개가 되라는 어머니 말씀은 순한 개가 될 것이 틀림없는 딸에게 보내는 우려 깃든 가훈이었음을
압니다.
이 세상의 똑똑한 무는 개들은 그냥 물라고 하세요.
그래도 어머니, 조금쯤은 무는 개가 될래요. 까짓 조금쯤 서운하고 억울한 일은 그냥 눈감을지라도, 세상의 모든 옳지 않음에 대하여 컹컹 짖어대는 무는 개가 될래요.
무는 개가 되라. 어머니 그 말이 맞아요.
〈그림〉
프랑스 화가 장 뒤비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즐거움을 닮았다고 말했다.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신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작가 자신의 병들고 우울한 정신의 치료행위라고 말했다. 내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낚시꾼의 고기잡이며, 우울한 날의 마음 다스리기며, 뜨게질하는 여인의 조용한 인내며, 득도하는 스님의 오랜 침묵이며,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을 불러내는 신비의 마법이다. 이 무겁고도 가벼운 생의 한가운데서, 누가 뭐라든 중심을 잡고 끝까지 잘 살아내라는 내 아버지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말〉
우리말의 표현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눈에 밟히다”와 “마음에 못을 박는다”는 표현이다. 그리움과 고통을 그처럼 아름답고 실감나게 표현한 말이 그 어디에 또 있을까?
또 하나 기막힌 표현력을 지닌 말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다.
촌스럽고 어색하고 당연히 있어야할 곳에 놓여 있지 않은 어정정한 상황. 자신이 그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 말의 어원에 감탄한다.
화려한 파티에 초대되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우아한 모습과 말씨로 자신을 뽐내며 공허한 토론을 벌일 때, 줄기도 뿌리도 없는 무성한 소문들이 비행접시처럼 떠돌 때, 나는 이 지구 한 모퉁이에서 자루의 주둥이 사이로 빠끔 눈을 내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화성에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생각이 든다.
〈마음, 얼굴, 목소리〉
마음이 착한 사람에게는 그 착한 마음을 읽으면 되고, 얼굴이 고운 사람에게서는 그 고운 모습만 보면 되고, 목소리가 좋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음성만 들으면 된다.
신은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할 때 완벽한 물건을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면서 늘 뿌리 없는 식물을 가꾸는 피로함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완벽함을 아니 그와 비슷한 무엇을 꿈꾸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배울 것 없는 저보다 못한 자와는 친구하지 말라 하셨지만, 그러나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못난 놈 눈감아 주면서 조금쯤은 더불어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