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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희 Jan 23. 2021

그곳에 있지 않아요


인륜과 천륜을 제대로 가르쳐보겠다고 도척을

만나고 돌아선 공자는 허둥대며 말고삐를

세번이나 놓치며 정신이 혼미하여 겨우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세상 이치를 꿰뚫은 자 누구였는지.

누가 더 옳다, 그르다 말 할 수 있을까.

지극히 심오하며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어짊과 의로움에 대한 동서고금의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들. 몇 십년을 뒤적이며 한꼭지,

한꼭지 주워 섬긴 오묘하며 신비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아녀자의 개운함은

그곳에 있지 않을까.


주방에 쌓인 설겆이를 끝내고 행주를 꼭 짜는

그 맛이 더 개운했으며, 또 다 돌려진 빨래를

탁탁 털어 널어 놓고 돌아서는 청정함. 그리고

따뜻한 침대와 목욕, 좋아하는 반찬과 톡 쏘는

탄산수. 이렇듯 단순하며 가벼운 일상이

더 속속들이 내 안의 나를 비워지게도 하며

채운 것을. 지금까지 독서라는 것을 통해 예민한

정신 세계로 곧잘 빠져들었지만 결국엔 거의

대부분의 명언과 신박하며 쌈박한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와 멀리 할 수도 없다. 오래도록

그들을 곁에 두며 대목 대목마다 경쾌함과

영묘함를 느끼며 떠오른 기운을 모아 모아

터치감이 좋은 자판의 자음과 모음을 배열할

것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철학자와 심오한

작가들. 사실 그들은 초라하며 숭숭 구멍 많은  

내 머릿 속을 이만큼이나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처량한 기운을 드높여 주며 만족을 주었기에.


새벽이면 손 닿은 가까이에 있는 것 중에

소설도 있고 시집도 있지만, 오래된 장자의

잡편, 제 29, *괴수 도척*편을 보다가 문득

뭔가 끄적여보고 싶은 기분에 여기까지

끌리는대로 엮어지게 되었다.


장자가 자신이 가진 사상을 도척이란 인물을

통해 공자의 장황한 仁과 禮를 신랄하게 비틀어댄다.

쉽게 말해 자뻑에 빠진 공자의 道는

도척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 숟가락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일갈하는 듯하다.


집안에서의 설겆이와 빨래의 개운함이,  

도척이 공자를 한 방 크게 혼내는 명징함과

통쾌함이 같을 수는 없지만, 이 몸이 더 늙고

병들면 언젠가는 주방과 세탁실에서 멀어진.

그러나 아직은 내 영역인 곳에서 일용 할

양식을 위해 일하는 남편과 마주할 밥과

반찬을 뚝딱거리며 만들어내고 반복되는

행주를 짜고 쓸고 닦는 일,

여기에 인생 미학이 있었음을.


오늘 아침엔 날도 포근하여 창문을 죄다 열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밀었다. 그리곤

노트북을 열었다.

지금 창밖에 까마귀 꽉꽉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비둘기가 배란다에서 이어진 철제

지붕 위를 급하게 타다다닥 오가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젠 밑 끝도 없는 글자들을 마무리하며

노트북을 닫아야겠다.


쓰고나니 웬지 개운하며 편안하다


파스텔&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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