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이담이 먼저 손을 흔들며 여상히 인사하자 윤희가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말을 건넸다.
“오늘 외출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이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배었다.
“차가 필요하겠구나.”
낮게 깔린 연월의 말에 윤희가 답했다.
“네, 차가 필요해요.”
셋이 주방의 식탁으로 가 앉자, 랑은 연월의 의자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연월이 곧장 내온 윤희의 차에 옅은 자줏빛 꽃잎이 한 장 떠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꽃인가요?”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윤희가 차를 마셨다.
“진실의 꽃이야.”
연월은 윤희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대답을 들려주었다.
“진실의 꽃?”
처음 듣는 꽃의 이름에 윤희가 그대로 되물었다.
“응, 그 차를 마시면 진실만을 말하게 되지.”
윤희의 얼굴에 약간의 노기와 함께 불안이 서렸다.
“네가 바림에 간 건 실수야, 그렇지?”
이담은 여전히 나긋하게 물었다.
“아뇨, 실수가 아니에요.”
윤희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럼 그곳에 간 이유가 뭐지?”
“한경에 가기 위해서요.”
“한경엔 왜 가려고 했지?”
“어머니의 편지를 찾아야 해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안부도 전하고 싶었어요.”
윤희는 제 멋대로 나불대는 입 때문에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연월이 윤희에게 새로운 차를 내주었다.
윤희가 경계를 가득 담은 눈으로 찻잔을 밀어내자 연월이 다시 밀어주며 말했다.
“해독차야.”
연월의 말에 윤희는 부루퉁한 얼굴로 찻잔을 싹 비웠다.
“너무해요.”
윤희가 눈을 치뜨고 이담과 연월을 번갈아 보았다.
“미안, 미안. 네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어.”
윤희가 억울해하자 이담이 서둘러 사과했다.
“그런데 아직 그곳에 미련이 남았니?”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정말로 어머니의 편지만 찾고 돌아오려고 했어요. 된다면 간 김에 아버지께 안부도 전하고요.”
윤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네가 아무리 여느 서천인과 다르다고 해도 서천을 벗어나는 건 위험해.”
“그래, 네가 만약 바림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한경까지 가는 데에 성공한대도, 어머니의 편지를 찾고 돌아온대도, 서천에 다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어.”
연월과 이담이 번갈아 타일렀다.
“들어오지 못하면요?”
윤희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바림에 갇히거나 사바를 떠돌겠지.”
연월이 답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이번 물음에는 이담이 답했다.
“바림에 갇히면 괴물에게 잡아 먹힐 테고, 사바를 떠도는 망령은 결국 악령이 되고 말아.”
윤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듯 보여 이담과 연월은 목을 축이고자 찻잔을 들었다.
“저, 반은 정령이라면서요!”
윤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버럭 소리쳤다.
쿨럭.
“그랬지.”
이담이 차를 잘못 삼켰는지 쿨럭대며 답했다.
“그럼 저도 이담처럼 오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너와 나는 달라.”
“뭐가 달라요.”
“네겐 아직 꽃이 남아 있잖아. 정령은 원래 꽃을 품고 태어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럼 제가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두 분은 정확히 아시나요?”
“……정확히는, 모른다고 할 수 있지.”
이담이 망설이다 사실대로 고했다.
윤희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라면서 자신을 말리기만 하니 답답할 따름이다.
윤희 역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가능성이 적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요.”
윤희가 간절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정해진 규율엔 예외가 없고, 우리에겐 서천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이담이 드물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윤희는 오기가 생겼다.
둘에게 꼭 서천 출입에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튼 안 돼.”
윤희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연월이 단호하게 경고하자 이담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반은 인간이니 적어도 오 할의 위험은 남아 있어. 어쩌면 더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몰라.”
이담은 윤희의 눈을 바라보며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꽃이 지고 나면 네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우리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윤희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꽃이 지고 이대로 영영 사라지게 되면요?”
울먹이는 윤희의 말에 이담과 연월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거기나 여기나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잔뜩 풀이 죽은 윤희가 먼저 자리를 비웠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랑이 고개를 들고 떠나는 윤희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에 어렴풋이 연민이 서렸다.
날이 밝고도 한참을 침상에서 뒹굴던 윤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서재로 갔으나 도무지 공부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손 놓고 있기에는 마음이 영 불편하여 그림이라도 볼 생각에 책상 앞에 구부정히 앉았다.
힐끔, 책상 위에 뜬 사바의 달력을 습관처럼 확인하고 이담이 두고 간 <초심자를 위한 도원 생활 백서>를 펼쳤다.
보는 둥 마는 둥 책장을 팔락거리며 넘기다 눈에 익은 그림을 발견했다.
‘어라, 그 붓이랑 똑같이 생겼네.’
윤희의 기억에서 그간 완전히 잊힌, 어느 노파가 준 붓이 책 속에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붓이야 흔하지만 그 붓은 달랐다.
희고 윤기 나는 붓촉에 검은 대나무 붓대는 아주 매끈하여 귀한 붓이었다.
누가 무엇이 특별하냐고 물어본다면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윤희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이것도 옷궤에 넣어 놓았는데.”
윤희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한경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다시 달력을 확인했다.
보름이다.
보름이면 연월이 서천을 비우는 날이다.
윤희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혼자 가면 또 들킬 거야.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역시 연월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어. 아니, 안 될 게 뻔해. 어떻게 해야 하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발을 까딱거리며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으-. 방법이 없어.”
이내 눈을 뜨고 바라본 창밖은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하아-. 뭘 했다고 벌써…….”
윤희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마당으로 나와 버드나무 밑에 앉았다.
“명주야, 명주야. 방법이 없을까?”
윤희의 눈앞에 나타난 구체는 연월의 뒷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일단 연월에게 가볼까.”
뾰족한 수는 없어도 연월을 보여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윤희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쩐 일이야?”
“그냥요.”
“그냥?”
미심쩍은 눈빛으로 연월이 눈알을 굴리며 어색하게 웃는 윤희를 보았다.
“오늘은 놀아줄 시간 없어.”
“알아요. 보름이잖아요.”
연월의 얼굴에 의심이 스몄다가 사라졌다.
“널 데려가 줄 생각도 없어.”
“그것도 알아요.”
윤희가 부루퉁하게 대답한 뒤 슬쩍 연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여기서 저녁은 먹어도 되죠?”
연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될 건 없지.”
윤희가 뒤로 숨겼던 바구니를 앞으로 들어 보이자 연월이 평연히 받아 들었다.
수련에게 받아 온 음식으로 연월과 저녁을 배불리 먹은 윤희는 대책도 없이 식탁에 앉아 미적거렸다.
“안 가?”
연월이 차를 내오며 말했다.
“이건 무슨 차예요?”
윤희는 이제 대답을 듣기 전에 연월의 차를 마시지 않았다.
“박하차야.”
그제야 찻잔을 손에 든 윤희가 연월을 흘끗 보고는 얼버무리 듯 말했다.
“이 차만 마시고 갈게요.”
대답을 들은 연월은 가만히 턱을 괴고 윤희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윤희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거두지 않았다.
윤희는 부담스러운 연월의 눈길에 지고 말았다.
방법도 찾지 못하고 시간 끌기에도 실패한 것이다.
그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윤희는 근처 숲을 거닐었다.
‘지금쯤 한경에는 달이 높이 떴을까?’
윤희는 나무 사이에 걸린 연월의 집 그림자를 흘려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월의 집에 오기 전, 윤희는 수련의 집을 먼저 방문했다.
“연월의 저녁 식사를 배달하려고요.”
수련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네가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우선 들어와서 앉으렴.”
수련이 바구니에 음식을 담으며 여상히 물었다.
“무슨 고민 있니?”
“아, 별거 아니에요. 답을 찾기가 어려운 문제를 발견했거든요.”
뜨끔한 윤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어머, 그래? 하고 수련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면 모자라진 않겠지?”
“그럼요, 충분해요.”
수련이 바구니의 뚜껑을 덮고 윤희에게 건넸다.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해진 과정과 답만이 꼭 맞는 해결책이 아닐 때도 있단다.”
수련이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분명 내게 극락이야.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서천인은 없을 거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을 하며 기쁨을 쌓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으니까. 나중의 행복 같은 건 없어.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를 운명의 날을 기다리며 지금만을 살아가니까.“
수련이 지그시 윤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넌 우리와 다르잖니. 너의 운명은 아무도 몰라. 그러니 네가 어디로 가든, 뛰어가든 걸어가든, 혹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든, 모든 결정은 네 몫이고, 네 뜻과 선택, 그리고 너의 행동만이 네 운명을 만들 수 있어.”
순간 수련의 얼굴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언젠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네가 하기 나름이야. 네게 뜻만 있다면 약한 몸은 문제 될 게 없단다. 언제까지고 약하기만 한 게 아닐 테니까.’
어린 윤희에겐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아파서 누워 있을 적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건강한 몸을 가져보기도 했고, 한순간 뒤집힌 평판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또 누명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앞날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윤희는 목 아래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수련과 눈을 맞추었다.
“맞아요, 애초에 정답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문제였어요.”
수련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윤희는 자신의 직감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끼익, 달칵.
연월의 집 그림자에 기다란 빛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연월은 은은한 빛을 발했다.
윤희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쉬운 방법을 두고 왜 힘들게 걸어가는 거지?’
윤희가 거리를 좁히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연월의 뒷모습이 명주가 보여준 장면과 너무도 닮아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이거야. 명주는 이 장면을 보여준 거야. 왜 여태 이 생각을 못했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윤희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윤희는 연월의 걸음에 맞춰 따라 걸었다.
연월이 걸으면 걷고, 멈추면 나무 뒤로 숨었다.
윤희가 세 번째로 나무에 몸을 숨겼을 때, 연월에게 작은 종이가 날아들었다.
연월이 작은 종이를 확인하고 허공으로 날리자 종이는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은은하게 발하던 연월의 빛이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바림의 숲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윤희는 강한 빛을 피해 나무 뒤로 몸을 완전히 숨기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은 금세 사라졌다.
그러나 눈꺼풀 너머로 돌아온 어둠에 살며시 눈을 떠 보아도 시야는 한참 동안 어른거렸다.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어두운 숲 속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력을 되찾은 윤희가 나무 옆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리고 정확히 윤희를 향해 선 연월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너!”
연월이 순식간에 윤희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큰 북소리가 떨어졌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두웅-!!